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장, 다른백년연구원장 새 유형의 지식인은 필요하다. 80년대 이후 미국과 일본의 보수화와 퇴영적 모습은 공공 지식인의 소멸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가나 사회 전반에 대해 비판과 대안의 목소리를 낼 사람, 기초학문과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위해 뛸 젊은이는 언제나 필요하다. 지난 4월 스위스에서 열린 국제학술행사에 참가했다. 둘러보니 40여명의 참석자 중 내가 최연장자에 속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약간 놀랐다. 한국에서는 학술행사나 각종 토론회, 그리고 시민사회의 모임에 가면 50대 중·후반 사람들이 거의 단상에 앉아 있거나 마이크를 쥔 경우가 많고, 청중도 대부분 이 또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학회, 시민모임, 노조에 젊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도 한참 되었다. 늙어가는 한국? 베이비붐 세대의 장기집권? 청년들 무시하는 위계서열 조직 문화? 그런 점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봐도 3, 40대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모임에 올 3, 40대 자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기업이나 창업 현장에는 정말 야심차고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몰리는 것 같다. 그러나 각 언론과 잡지의 지면, 시민운동권, 노조, 학계나 정치권 모임에는 머리 희끗희끗한 사람들이 언제나 얼굴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물론 학생운동이 소멸하고 대학에서 아카데미즘이 실종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과거 학생운동은 공보다는 과가 크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과거 학생운동이 국가나 민족, 사회의 대의를 위해 정열을 바친 공공 지식인의 양성 기지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데 대학이 상업화, 기업화되면서 대학에서 학문과 사회운동을 꿈꾸는 젊은이들은 사라졌다. 외환위기 이후 모든 청년은 신자유주의 논리에 적응해야 했고, 시장질서는 이들을 경쟁적 인간으로 만들어냈다. 시장에서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자격증을 주지는 않는 문화예술, 기초학문, 시민운동, 정치 분야에서는 이제 청년들이 사라졌다. 이 방면에 소양과 의지가 있는 청년들도 대기업 입사, 언론 고시, 교사 고시, 로스쿨, 미국 유학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자격증을 따거나 힘들게 취업을 한 사람들도 더는 공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생존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지만, 치열한 경쟁을 거치다 보니 그들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재정 여력도 없었지만, 미래를 대비할 여유도 없었던 시민사회, 노조, 정당, 학계의 지도부는 ‘똑똑한’ 젊은이들을 잡지 못했다. 독일에는 약 2000개의 각종 공익재단이 있어서 사회의 인프라를 지탱한다. 그리고 모든 정당은 자체의 싱크탱크를 갖고서 미래의 정치가와 정책전문가를 길러 낸다. 내가 만난 30대의 에버트재단 한국 소장은 50대 한국 학자들의 식견을 넘어섰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 시민사회에는 제대로 된 정책연구소, 교육 연구 기능을 하는 재단이 없다. 중장기 조사 연구를 하는 대학 연구소도 찾아보기 어렵다. 총 수천억원의 예산을 지출하는 국책연구소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미래의 정책전문가를 기르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큰 교회나 사찰에는 매주 헌금이 몇 부대씩 채워진다. 물론 뜻있는 기부자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기부는 아직 ‘고아원 양로원 지원’ 수준이다. 7,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거나, 그렇게 하지 못한 도덕적 부채감 때문에 ‘돈 안 되는’ 일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바쳤던 ‘자리 잡은’ 기성세대는 한국의 ‘마지막 지식인들’이 되어 곧 은퇴할 것이다. 물론 그런 ‘지식인의 시대’는 갔다. 그러나 새 유형의 지식인은 필요하다. 80년대 이후 미국과 일본의 보수화와 퇴영적 모습은 공공 지식인의 소멸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가나 사회 전반에 대해 비판과 대안의 목소리를 낼 사람, 기초학문과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위해 뛸 젊은이는 언제나 필요하고, 그런 소양을 가진 사람들이 사기업이나 대형로펌으로 가게 내버려 두거나, 박사학위를 받고서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반실업자로 살아가도록 해서는 곤란하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연구재단의 인문한국(HK) 사업에 참여했던 박사들 수백명이 사업 방침 변경으로 이제 길거리로 나가게 생겼다. 그런데 이 사업 예산 다 합해도 130억밖에 안 된다. 서울시 문화재단 예산이 200억이 넘는다. 문재인 정부, 현 여당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도 바로 공공 지식인이 생존할 수 있는 물적 제도적 인프라를 만드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촛불을 제도적으로 완성하는 일이고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한 일이다.
칼럼 |
[김동춘 칼럼] ‘마지막 지식인들’, 그 이후는? |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장, 다른백년연구원장 새 유형의 지식인은 필요하다. 80년대 이후 미국과 일본의 보수화와 퇴영적 모습은 공공 지식인의 소멸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가나 사회 전반에 대해 비판과 대안의 목소리를 낼 사람, 기초학문과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위해 뛸 젊은이는 언제나 필요하다. 지난 4월 스위스에서 열린 국제학술행사에 참가했다. 둘러보니 40여명의 참석자 중 내가 최연장자에 속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약간 놀랐다. 한국에서는 학술행사나 각종 토론회, 그리고 시민사회의 모임에 가면 50대 중·후반 사람들이 거의 단상에 앉아 있거나 마이크를 쥔 경우가 많고, 청중도 대부분 이 또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학회, 시민모임, 노조에 젊은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도 한참 되었다. 늙어가는 한국? 베이비붐 세대의 장기집권? 청년들 무시하는 위계서열 조직 문화? 그런 점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봐도 3, 40대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런 모임에 올 3, 40대 자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기업이나 창업 현장에는 정말 야심차고 ‘능력 있는’ 젊은이들이 몰리는 것 같다. 그러나 각 언론과 잡지의 지면, 시민운동권, 노조, 학계나 정치권 모임에는 머리 희끗희끗한 사람들이 언제나 얼굴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물론 학생운동이 소멸하고 대학에서 아카데미즘이 실종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과거 학생운동은 공보다는 과가 크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과거 학생운동이 국가나 민족, 사회의 대의를 위해 정열을 바친 공공 지식인의 양성 기지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데 대학이 상업화, 기업화되면서 대학에서 학문과 사회운동을 꿈꾸는 젊은이들은 사라졌다. 외환위기 이후 모든 청년은 신자유주의 논리에 적응해야 했고, 시장질서는 이들을 경쟁적 인간으로 만들어냈다. 시장에서 곧바로 써먹을 수 있는 자격증을 주지는 않는 문화예술, 기초학문, 시민운동, 정치 분야에서는 이제 청년들이 사라졌다. 이 방면에 소양과 의지가 있는 청년들도 대기업 입사, 언론 고시, 교사 고시, 로스쿨, 미국 유학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자격증을 따거나 힘들게 취업을 한 사람들도 더는 공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생존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지만, 치열한 경쟁을 거치다 보니 그들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재정 여력도 없었지만, 미래를 대비할 여유도 없었던 시민사회, 노조, 정당, 학계의 지도부는 ‘똑똑한’ 젊은이들을 잡지 못했다. 독일에는 약 2000개의 각종 공익재단이 있어서 사회의 인프라를 지탱한다. 그리고 모든 정당은 자체의 싱크탱크를 갖고서 미래의 정치가와 정책전문가를 길러 낸다. 내가 만난 30대의 에버트재단 한국 소장은 50대 한국 학자들의 식견을 넘어섰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 시민사회에는 제대로 된 정책연구소, 교육 연구 기능을 하는 재단이 없다. 중장기 조사 연구를 하는 대학 연구소도 찾아보기 어렵다. 총 수천억원의 예산을 지출하는 국책연구소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미래의 정책전문가를 기르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큰 교회나 사찰에는 매주 헌금이 몇 부대씩 채워진다. 물론 뜻있는 기부자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기부는 아직 ‘고아원 양로원 지원’ 수준이다. 7, 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거나, 그렇게 하지 못한 도덕적 부채감 때문에 ‘돈 안 되는’ 일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바쳤던 ‘자리 잡은’ 기성세대는 한국의 ‘마지막 지식인들’이 되어 곧 은퇴할 것이다. 물론 그런 ‘지식인의 시대’는 갔다. 그러나 새 유형의 지식인은 필요하다. 80년대 이후 미국과 일본의 보수화와 퇴영적 모습은 공공 지식인의 소멸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가나 사회 전반에 대해 비판과 대안의 목소리를 낼 사람, 기초학문과 시민사회의 활성화를 위해 뛸 젊은이는 언제나 필요하고, 그런 소양을 가진 사람들이 사기업이나 대형로펌으로 가게 내버려 두거나, 박사학위를 받고서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반실업자로 살아가도록 해서는 곤란하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연구재단의 인문한국(HK) 사업에 참여했던 박사들 수백명이 사업 방침 변경으로 이제 길거리로 나가게 생겼다. 그런데 이 사업 예산 다 합해도 130억밖에 안 된다. 서울시 문화재단 예산이 200억이 넘는다. 문재인 정부, 현 여당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도 바로 공공 지식인이 생존할 수 있는 물적 제도적 인프라를 만드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촛불을 제도적으로 완성하는 일이고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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