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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2.11 17:55 수정 : 2018.12.12 09:30

김동춘
성공회대 엔지오대학원장

국내외의 이 엄청난 도전에 맞서야 할 한국의 지식 생태계는 거의 무너졌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100대 과제에 ‘학문’이라는 단어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극히 중요한 정책 결정을 앞두고 미국의 ‘세계적’ 전문가만 불러오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문재인 정부는 골드만삭스 출신 경제학자 권구훈을 북방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말한 ‘통일대박’ 보고서를 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정부는 그의 인선에 대한 비판이 일자 남북 교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그의 이력으로 짐작해보면 문재인 정부는 북한을 투자처, 즉 무주공산의 시장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경제 전문가로서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모처럼 치오르는 남북 화해와 평화의 기운을 문재인 정부가 어떻게 이끌어갈 계획인지 묻는다. 남북 화해와 평화는 남북한 사회 모두의 거대한 질적 전환과 동북아 정치·경제 질서 전체의 판갈이를 요구하는 지난 70년 이래 대사건인데 과연 한국이 그것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까 묻는다.

1990년대 이후 최근까지 한국에는 두 유령이 떠돌았는데 ‘북한붕괴론’과 ‘시장만능론’이 그것이다. 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한국 대다수의 정치학자, 주류언론, 국책연구기관은 북한 붕괴가 임박했다고 외쳤다. 당시 정종욱 대통령 안보보좌관이 미국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과 한 전화통화에서 ‘북한이 6개월 내지 2년 안에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김영삼 대통령은 “언제 갑자기 통일이 눈앞에 닥쳐올지 모른다”며 북한 붕괴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없었다.

97년 외환위기로 나라가 국가부도 상태에 몰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라는 굴욕을 맛보았을 때 대다수의 경제학자, 주류언론, 국책연구기관은 시장경제, 외국자본의 유입, 공기업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가 한국 경제의 체질을 개선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래서 한국은 아이엠에프 관리체제에서 조기 졸업했지만,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신자유주의 체질로 변했다. 그 결과 재벌체제는 강화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최고 수준의 임금 불평등, 자산 불평등 국가가 되었다. 산업정책이 실종되고 내수시장이 살아나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전세계는 저성장 기조가 유지되고 있으며, 기후환경 위기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으며, 한달째 지속되는 프랑스의 시위가 보여주듯이 지구적 불평등은 극에 달해 있다. 사실 한국 청년들의 좌절은 프랑스 청년들 못지않지만, 그들은 목소리를 낼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만 철회하고 있을 따름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그런 ‘북한붕괴론’을 무시하고서 대북 화해 정책을 폈지만, 정부, 학계 우군의 지원을 받지 못했고, 복지 확대나 사회적 합의를 추진할 의지는 있었으나 경제학자나 경제관료, 주류언론의 시장주의와 친재벌 담론의 융단폭격에 거의 일방적으로 밀려 그들의 주장을 대체로 수용했다. 오늘 문재인 정부의 평화 대북 화해 전략은 크게 칭찬할 만한 대성과이지만, 권구훈의 임명이 상징하는 것처럼 방향과 대북 경제교류의 철학이 개발독재 성장주의 방식의 박근혜 정부와 뭐가 다른지 분명하지 않다.

외환위기 당시 아이엠에프가 한국에 요구했던 무리한 구조조정과 경제 개방의 처방이 한국 경제를 살리는 길이었다고 여전히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탈산업화 시대의 세계 경제 질서, 과거 동서독 통일의 경험, 북한 현대사와 변화하는 동북아 국제정치에 대한 식견에 기초한 장단기 국가 전략, 특히 남북한 보통사람들의 생존과 자존감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한데, 그런 청사진을 골드만삭스나 세계은행이 제공해줄까?

조선 말기 과거시험 최우등 출신 관료들이 서세동점의 시대 변화를 읽었던가? 외환위기 당시 사법시험·행정고시 출신 최우등 판사나 관료들이 국가부도를 경고했던가? 대학에 있는 하버드나 시카고 경제학 박사 모두 집결시켜 머리를 짜내면 답이 나올까? 정당이나 국책연구기관에는 북한, 중국, 독일, 미국 전문가가 얼마나 있나?

국내외의 이 엄청난 도전에 맞서야 할 한국의 지식 생태계는 거의 무너졌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의 100대 과제에 ‘학문’이라는 단어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극히 중요한 정책 결정을 앞두고 미국의 ‘세계적’ 전문가만 불러오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지식과 학문은 국가의 인프라 중 가장 중요한 인프라다. 학문은 학자들의 밥벌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 대개조를 위한 이념, 정책, 교육, 언론, 출판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세상이 안 바뀐다고 생각한다면, 변화를 이끌 지식 집단이 있는지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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