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7.03 19:50
수정 : 2006.07.04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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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데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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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4월 야스쿠니 신사를 둘러싼 정치·사상적 문제들에 대한 견해를 정리해 책을 냈다.(한국어판은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 그 가운데 ‘감정의 연금술’이라는 표현을 두고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야스쿠니 신사는 전사한 군인·군속을 신으로 모시고, ‘천황’이 거기에 참배해 그 공적을 최대한으로 칭송한다. 전사는 ‘나라와 천황을 위한’ 명예로운 죽음이며, 야스쿠니 영령은 제국 신민의 최고 모범으로 불렸다. 이 때문에 전사자 유족은 본래 슬픔에 잠겨야 할 터인데, 오히려 자랑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가족의 전사와 전쟁을 원망하는 게 아니라 긍정하게 된다. 유족의 슬픔을 기쁨으로 180도 전환시키는 야스쿠니의 기능을 나는 ‘감정의 연금술’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유족의 감정이 그렇게 단순할 리가 없다” “슬픔이 그렇게 간단하게 기쁨으로 바뀐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등의 반론도 적지 않았다. 나 또한 실제 유족의 감정이 그렇게 깨끗이 없어지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당시의 사료를 보면, 아들·남편이 야스쿠니에 모셔진 어머니·아내는 속마음이 어떻든 ‘감격의 눈물이 솟구치는’ 것으로 돼 있다. 그것이 제국 신민의 당연한 모습으로 돼 있었다.
당시 백만부 이상 발행됐다는 여성잡지 <주부의 벗> 1944년 1월호에 실린 ‘군국의 어머니를 방문하고’라는 기사가 전형적 사례다. 고치현 산골 가난한 마을에 궁핍과 중노동을 견디며 네 아들을 육·해군 장병으로 길러, 그 가운데 세 아들이 야스쿠니의 영령이 된 쓰쓰이 마쓰라는 여성이 있다. 잡지사가 주재한 ‘군국의 어머니 현창식’에서 표창장을 받은 그의 집을 기자가 찾아갔다.
스무살에 빈농 청년에게 시집온 쓰쓰이는 개간, 제초, 소치기, 양잠, 표백 등으로 열심히 일해야 했다. 16관(1관은 3.75㎏)의 거름통이나 20관짜리 쌀가마니를 짊어져 어깨 살이 벗겨지는 아픔을 참으면서 일하는 동안 아이들이 계속 태어났지만, 불행하게도 남편은 폐렴으로 숨졌다.
처음 장남의 전사 통지가 왔을 때, 그는 일하던 뽕밭의 수풀에 쓰러져 해가 질 때까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뒤이은 차남의 전사. 그러나 쓰쓰이는 아들들이 야스쿠니에 모셔지는 합사제에 초대돼 참례했을 때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황송하게도 천황폐하가 참배하시는 모습을 봤다. 우리 같은 천한 산골 출신은 설령 칠팔십까지 살았더라도 병 등으로 죽으면 산속의 너구리도 울어주지 않는다. 그런데 나라를 위해 죽었기 때문에 천황 폐하까지 참배해주시는 것이다. 감전된 것처럼 기쁘고 고마운 일이란 것을 깨달았다. 괴로운 기분은 완전히 사라지고 아이는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밝아졌다.” 이것이야말로 확실히 감정의 연금술이다. 쓰쓰이의 슬픔은 감전된 것처럼 극적으로 정반대의 감정으로 바뀐 것이다.
거기서 나는 생각한다. 야스쿠니의 감정의 연금술은, 한반도 출신 합사자의 유족들에게는 어떻게 작용했는가? 그리고 유족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현재 한국의 유족에게서는 합사 취소를 요구하는 중요한 소송이 제기돼 있다. 합사 취소 실현을 위해서도 당시의 실태를 알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또 한가지.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은 지배·피지배 민족으로서 넘기 어려운 단절로 떨어져 있었다. 감정의 연금술에 지배되지 않고 유족의 슬픔이라는 공통성으로 이런 단절을 넘을 수 있었을 것인가? 또는 군국주의 지배자의 권력이나 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저변 민중의, 가난과 고통의 공통성으로 넘을 수 있었을 것인가? 불가능했다면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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