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9.25 18:15
수정 : 2006.09.25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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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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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창
지난 21일 도쿄 지법에서 일본의 히노마루(국기)와 기미가요(국가)에 관한 중요한 판결이 있었다. 히노마루·기미가요는 야스쿠니, 역사인식과 같이 ‘대일본 제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문제인 동시에, 오늘날 일본 사회의 큰 논쟁거리다. 과거 ‘제국의 상징’인 히노마루·기미가요는, 전후 평화헌법과 교육기본법 체제에서도 학교 행사에 일찍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정착시키려는 문부성·교육위원회 등 행정 쪽과 전쟁·식민지 지배에 사용된 역사 때문에 거부하는 교사·학생 사이의 대립이 계속돼 왔다.
1980년대 도쿄도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졸업식·입학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90년대 말부터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 국가주의자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의 등장, 국기·국가법 제정 등을 거쳐, 2003년 10월23일 도쿄도 교육위는 통지를 발표했다. 직무명령으로 교직원에게 히노마루를 향해 기미가요를 부르도록 하고, 따르지 않는 교직원은 징계하겠다고 밝혔다. 처분을 각오하고 기립을 거부해 징계를 받은 교직원이 400여명에 이른다.
강제에 반대하는 교직원들은 도 교육위의 통지·직무명령에 따를 의무가 없다는 확인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여기에 도쿄 지법은 원고의 주장을 거의 전면적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패소는 1%도 예상하지 않았다”는 도 교육위 직원이 있는가 하면, “꿈같은 판결로 믿을 수 없다”고 기뻐하는 교사들도 있다. 양쪽 다 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역으로 말하면, 지금 일본에선 그 정도로 교육의 자유가 존중되지 않고, 상의하달이 당연한 것으로 돼버렸다는 뜻 아닌가.
현장의 재량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통지나 명령으로 기립·제창을 강요하는 것이 헌법 19조에 보장된 사상·양심의 자유의 침해이며, 교육기본법에서 금지한 ‘부당한 지배’에 해당한다는 판단이 판결의 핵심이다. 판결은 또 히노마루·기미가요가 “황국 사상이나 군국주의 사상의 정신적 지주”였던 점을 언급하며, 지금도 “가치 중립적으로 인정되지는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소수자의 사상·양심의 자유를 보호한다는 취지에서도 교육위의 통지·지도를 지나치다고 인정했다. 이 역시 민주주의나 입헌주의의 원칙에 매우 충실한 관점이다.
판결이 히노마루·기미가요의 의식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국기·국가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게 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은 중요”하며, 졸업식·입학식 등에서 그런 의식을 치르는 것은 “의미 있다”고 밝혔다. 사상·양심의 자유 또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에는 제약을 받는다며, 의식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거나 기립·제창 거부를 부추기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했다. 도쿄의 학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은 비정상적 ‘강제’ ‘과도’ ‘일탈’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은 아직도 헌법이나 교육기본법의 취지에 비춰 ‘상식적인’ 판결이 ‘꿈같이’ 생각되거나 ‘이례적’ ‘획기적’ ‘역사적’으로 평가되는 사회다. 게다가 지금 그 헌법과 교육기본법의 개정을 공약으로 내건 정권이 탄생한다.
지금은 기립·제창 강제를 위법이라고 단정하는 판결이 가능하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제약을 강화하려는 개헌안이나, 교육의 주체를 국민으로부터 정부·행정으로 옮기려는 교육기본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그런 가능성 자체가 없어져 버릴 것이다. 민주주의의 꿈이 이보다 더 멀어져도 되는 것일까.
그러나 비록 소수파이지만 히노마루·기미가요 강제에 대해 처분을 각오하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아직 일본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지원하는 운동이 존재하고, 이런 판결이 나온다. 아직 희망은 있다.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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