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7.07.01 18:05 수정 : 2007.07.01 18:05

훙칭보/중국 월간 <당대> 편집 부국장

세계의 창

인구는 늘 중국 경제의 콤플렉스였다. 인구가 많으면 경제 발전이 더디다는 게 공통된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옛말에도 “사람이 많으면 일하기가 쉽고, 사람이 적으면 밥먹기가 쉽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요즘 경제학자들은 중국의 인구가 경제 발전의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중국은 최근 거대한 인구의 활발한 소비라는 ‘인구홍리’(人口紅利)를 만끽하고 있다.

중국의 소비는 이미 오래전에 세계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1840년 아편전쟁의 정치적 원인은 영국의 제국주의 침략이었지만, 경제적 원인은 중국의 소비였다. 영국이 4억의 인구를 거느린 중국을 발견했을 때, 영악한 상인들은 바로 주판알을 튕겼다. 중국인 한 명에 모자를 하나씩만 판다면 영국의 방직공장을 모두 돌린다 해도 부족할 것이니 얼마나 흥분했겠는가?

그러나 당시 중국인들은 영국의 모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모자가 나빠서가 아니라 농업사회에서 살아가는 중국인들에겐 영국의 모자를 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은 중국의 비단과 찻잎이 필요했다. 결국 영국은 엄청난 무역적자를 안게 됐다. 자존심이 상한 영국은 어느 나라 사람이든 살 수밖에 없는 상품을 발견했다. 바로 아편이었다. 아편은 두 나라의 무역구조를 단숨에 바꿨다. 파산 지경에 몰린 중국이 아편을 금지하자 영국은 대포를 들이밀었다.

이후 한 세기 넘게 중국은 전쟁과 동란에 빠졌다. 백성들은 아침에 깨어나 저녁밥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1949년 공산당 정부가 들어섰지만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부는 백성들에게 먹고 입는 것을 아끼라고 호소했다. 당시 중국에선 국가급 영도자와 간부들도 먹고 입는 것만 보장받았다. 백성들의 생활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 건국 2세대가 일터에 나서면서 중국의 소비가 부활하기 시작했다. 당시 백성들의 소비는 자전거, 손목시계, 재봉틀 등 세 가지 생활필수품에 집중됐다. 이들 상품은 일종의 부자 증명서였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 경제는 더욱 발전했다. 사람들은 이제 텔레비전, 냉장고, 에어컨이라는 세 가지 가전제품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중국은 마침내 모두가 먹고살 만한 샤오캉(小康) 사회의 문턱에 들어섰다.

그런데 돌연 중국의 소비가 멈췄다. 심지어 통화긴축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수입이 증가했지만, 새로운 소비목표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있었지만, 당시 중국인들에게 자동차는 사치로 받아들여졌다. 더욱이 사회보장 체제가 허술했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소비 대신 저축에 몰려들었다. 정부는 소비를 이끌고자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고, 이른바 황금주를 만들었지만, 이들 역시 곧 한계를 드러냈다.

부동산이 이런 상황을 일거에 깨뜨렸다. 부동산은 비싸기 때문에 아무리 저축이 많아도 사기 어렵다. 제일 처음 아파트를 산 이들은 졸부들이었다. 돈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던 이들은 아파트에 돈을 쏟아부었다. 부동산은 성공의 증명이라는 부가가치를 뽐냈다. 이어 많은 사람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 부동산을 사기 시작했다. 자동차를 살까 말까 하던 저울질도 사라졌다. 사람들의 고민은 이제 어떤 차로 바꿀까로 바뀌었다.

요즘 중국인들의 소비 원칙은 필요한 것을 사는 게 아니라 비싼 것을 사는 것이다. 중국이 과시성 소비의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만일 아편전쟁 무렵 중국인들이 지금의 소비능력을 갖췄다면, 홍콩에 정박한 영국의 배는 군함이 아니라 화물선이었을 것이다.


훙칭보/중국 월간 <당대> 편집 부국장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계의 창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