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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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창
한국에도 이미 알려진 것처럼 지난 7월29일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이 대패하고 민주당이 압승을 거뒀다. 자민·공명당 등 여당은 과반수에 미치지 못해 여당 다수의 중의원과 야당 다수의 참의원이라는 ‘뒤틀린’ 국회가 출현하게 됐다. 자민당의 패인으로는 연금제도를 둘러싼 대정부 불만 이외에 아베 내각 각료들의 잇따른 추문과 사임이 우선 거론된다. 규마 후미오 방위상의 적절치 못한 원폭 발언도 그중 하나다. “나가사키에 투하돼 비참한 지경을 당했지만, 그것으로 전쟁이 끝났다라고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가지고 미국을 원망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규마 방위상의 지역구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는 물론, 전국에서 비난과 항의의 목소리가 쇄도해 그는 7월3일 사임으로 내몰렸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으로 같은 해 말까지 21만명이 숨지고, 지금도 26만명의 피폭자가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지난 96년 국제사법재판소는 “핵무기의 사용은 원칙적으로 국제법 위반”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비전투원을 무차별 대량으로 살상한 것이 명백한 원폭투하는 전쟁범죄이며, 피폭국 일본의 피폭지역 나가사키 출신 정치가가 그것을 용인하는 일은 용서할 수 없다. 다만 방위상의 ‘문제 발언’이 일본의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다뤄진 것을 보면서 나 자신은 솔직히 말해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원폭투하 어쩔 수 없다’는 발언을 듣고 나는 이미 히로히토 국왕(연호 쇼와)의 ‘원폭투하 부득이하다’는 발언을 상기했다. 75년 10월 기자회견에서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투하에 대한 감상을 질문받은 히로히토 국왕은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 중이므로 히로시마 시민에 대해서는 안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규마의 발언도, 히로히토 국왕의 발언도 원폭투하는 ‘어쩔 수 없다’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그러나 히로히토 국왕의 발언에 대해서는 이번과 같은 격한 항의나 비난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히로히토 국왕은 1945년 2월 ‘국체호지’(천황제 유지)의 보증이 없다며 고노에 후미마로 당시 총리의 조기 종전 제안을 물리쳤다. 그 시점에서 종전 결단을 했다면 오키나와전이나 원폭 피해도 없었을 터이기 때문에 그 책임이 거론되는 존재다. 그러나 규마의 발언을 대대적으로 문제삼은 신문, 텔레비전, 정치가들이 히로히토 국왕의 책임 문제를 다룰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기에서 일본 사회의 결정적 약점이 드러난다. 장관의 망언은 비판할 수 있어도 같은 취지의 국왕의 발언은 비판될 수 없다는 약점이다. 95년 일본 <엔에이치케이>(NHK)가 실시한 조사를 보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가 옳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이 일본 8.2%, 미국 62.3%, 한국 80.5%였다고 한다. 원폭투하를 긍정하는 사람이 미국보다도 한국에서 많았던 것은 왜일까? 원폭투하가 일본의 패전을 결정적으로 만들어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을 도왔다는 견해나, 전쟁 이후에도 식민지 지배나 침략의 책임을 명확히 인정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비판 등이 이유가 아닐까? 원폭의 참화와 피해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본인들이 한국·아시아인들에게 안겨준 참화와 고통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도 식민지 지배의 결과인데 피폭자 가운데는 조선인들도 있다. 일본에서든 한국에서든 원폭이라는 악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지기를 바란다.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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