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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2.02 18:03 수정 : 2007.12.02 18:03

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 교수·철학

세계의창

오랜만에 야스쿠니 문제로 시작하고 싶다. ‘시작하고 싶다’는 표현을 쓴 것은 사안이 일개 신사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후 일본’ 전체에 관한 문제로 돼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도미타 메모’에 대해서는 이미 이 칼럼에서 다뤘다.(2006년 8월8일치) 1988년 당시 도미타 도모히코 궁내청 장관이 쇼와(히로히토) 천황의 비공식 발언을 적어놓은 메모를 말한다. 이 메모에는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에 강한 불쾌감을 품은 히로히토 천황이 1975년을 마지막으로 야스쿠니 참배를 중단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일본의 우파, 야스쿠니파의 논객들은 이 메모가 사실이라면 자신들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기 때문에 메모의 날조설까지 제기해 그 증거 능력을 어떻게 하든 부정하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이후 도미타 메모의 내용과 합치하는 여러 자료가 공표된다. 히로히토 천황의 시종을 지낸 우라베 료고의 일기와 히로히토 천황에게 시를 가르치는 일을 했던 오카노 히로히토의 저서를 통해 소개된 도쿠가와 요시히로 전 시종장의 발언이 그것이다. 아무리 우파라고 해도 이제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어렵게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천황 자신과 관련된 깊숙한 문제가 잠복해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일본의 우파, 야스쿠니파, 특히 도쿄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 부정론자가 결코 다루지 않은 어떤 사실이 있다. 히로히토 천황이 도쿄재판의 결과에 감사했다는 사실이다. 1951년 4월15일 점령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와 히로히토 천황의 마지막 회담(11번째)이 열렸을 때, 천황은 맥아더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쟁재판에 대해 귀 사령관이 취하신 태도에 대해 이 기회에 사의를 표하고 싶다.” 맥아더의 답은 이렇다. “워싱턴에서 천황 재판에 대해 의견을 물어왔지만 물론 반대했다.” 이런 대화 내용은 회담에서 히로히토 천황의 통역을 지낸 외교관 마쓰이 아키라의 수기에서 밝혀진 것이다.(<아사히신문> 2002년 8월5일치 보도)

그럼 왜 히로히토 천황은 도쿄재판의 결과에 감사했던 것인가? 도쿄재판의 최대 정치적 초점은 히로히토 천황이 전범으로 기소되느냐 하는 것이었다. 미국 여론이나 오스트레일리아 등 다른 연합국들의 소추론을 누르고 천황 불기소를 결정한 것은, 점령통치와 친미 정권 확립을 위해 천황을 이용하려고 생각한 미국 정부였다. 도쿄재판은 이런 의미에서 A급 전범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천황에게 면죄부를 준 재판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일본 정부 이상으로 천황 자신에게도 지상명제였던 ‘국체호지’(국체인 천황을 보호한다는 뜻)가 달성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히로히토 천황이 소추됐다면 천황의 지위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을 것이며, 천황제 자체가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천황제를 최대 위기에서 구한 것이 실은 도쿄재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히로히토 천황이 미국 정부나 맥아더 원수에게 감사의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히로히토 천황에게 야스쿠니의 A급 전범 합사는 어떻게 비쳤을까? 천황제를 구하고 ‘전후 일본’이 미국의 비호 아래 상징 천황제 국가로서 ‘성공적’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해준 도쿄재판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으로 보였던 게 아닐까? 여기에 히로히토 천황의 불쾌감과 참배 중지의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히로히토 천황에게 도쿄재판의 결과를 뒤집는 일만큼은 인정될 수 없었던 것이다. ‘천황의 신사’로 일컬어지는 야스쿠니는 이렇게 해서 거대한 자기모순을 껴안고 만 것이다.

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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