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1.27 20:44
수정 : 2008.01.27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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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타르 카셈/팔레스타인 나자대학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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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창
중동에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국제사회가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는 큰 문제가 있다. 쿠르드 문제다. 이들은 2500만명이나 되며 독특한 언어와 문화를 갖고 있다. 절반 이상이 터키 동남부, 18%가 이라크, 23%가 이란, 5%가 시리아, 1.5%가 아르메니아에 있다. 이들 다섯 나라가 서로 국경을 맞댄 지역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1920년 제1차 세계대전의 주요 승전국이 서명한 세브르 조약에 따라 쿠르드는 독립국가가 될 예정이었다. 당시 이라크와 쿠웨이트, 이란이 독립국가가 됐다. 그러나 쿠르드족은 지금까지 그 권리가 부정됐다. 이라크·이란·터키가 쿠르드 국가를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쿠르드 국가가 생기면 자신들의 영토를 내줘야 하기 때문이다. 터키는 쿠르드 문제를 희석하기 위해 이들을 도시로 이주시키려 했다.
쿠르드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세 나라는 무시와 불공정의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이라크에 사는 쿠르드족은 1960년대 바그다드 중앙정부에 대항해 봉기를 시작했다. 이때 이들은 큰 실수를 했다.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이는 소수민족의 권리를 옹호해줄 것으로 여겨졌던 아랍 지식인과 정치인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라크군은 쿠르드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쿠르드는 이라크에서 일정 정도 자치를 얻어냈다.
터키에서는 쿠르드족이 비밀 정치결사체를 조직했다. 이는 나중에 전투조직으로 발전했다. 쿠르드 노동당은 터키의 쿠르디스탄에서 정치를 선도하기 시작했고, 터키를 상대로 군사행동을 시작했다. 쿠르드 노동당은 터키와 다른 독립적인 민족인 쿠르드의 자치권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이란의 쿠르드족은 이슬람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호메이니가 집권한 뒤 민족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란인들로선 쿠르드 봉기와 맞닥뜨리는 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가장 큰 군사충돌은 이라크에서 일어났다. 미국과 이스라엘 같은 나라들이 이라크의 불안정을 바랐기 때문이다. 쿠르드족은 여러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사담 후세인은 쿠르드 마을 한 곳에 화학무기를 사용해 5천명을 학살했다. 그러나 당시 국제사회는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미국이 이란과 대결하는 사담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라크군은 쿠르드 반군에 몇차례 대규모 공격을 수행했다. 쿠르드인 수천명이, 그렇지 않아도 쿠르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이란과 터키로 달아났다.
이라크 전쟁 전 미국은 북부 이라크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이라크 북부에 사는 쿠르드인들에게 바그다드로부터 독립된 정부를 가질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독립국가 건설은 허락하지 않았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인 터키가 반대하기 때문이다. 이라크의 쿠르드인들이 국가를 세운다면, 이에 자극받은 터키의 쿠르드인들도 독립 투쟁을 강화할 것이다.
터키는 주요 도시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한 쿠르드의 공격 때문에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최근 몇 달 동안 터키는 쿠르드 반군이 이라크 북부를 피신처로 활용하면 이 지역을 침략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이 위협은 이라크를 점령하고 있는 미국의 동의 없이는 이행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미국이 터키의 쿠르드 공격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이 터키의 공격을 인정했을 때 어떤 원칙보다 국가 이익을 우선 순위에 놓았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쿠르드인들의 생활은 고단하다. 세상은 지나치게 무관심하다. 쿠르드인들이 압제자들에 대한 군사공격을 확대하지 않는 한 세상이 반응하지 않을 건 분명하다. 잔혹한 인명살상이 벌어지기 전 정의가 세워지지 않는 것은 불행이다. 국제사회는 쿠르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앞으로 많은 나라들이 값비싼 대가를 치를 것이다.
사타르 카셈/팔레스타인 나자대학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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