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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3.16 19:42 수정 : 2008.03.16 19:42

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 교수·철학

세계의창

내가 새삼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다. 지난달 11일 오키나와 주둔 미군 해병대원이 여자 중학생(14)을 강간한 혐의로 오키나와 경찰서에 체포됐다. 면적은 일본 전체의 0.4%에 지나지 않지만 주일미군 기지의 75%가 밀집해 있는 오키나와에서는 미군 관계자의 흉악범죄가 빈발하고 있다. 1995년에는 해병대원 세 명이 여자 초등학생을 집단으로 강간한 사건이 발생해 미군기지 철거를 요구하는 항의운동으로 발전해 미-일 안보체제를 뒤흔드는 사태가 되기도 했다. 미군은 이런 종류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군기 철저’ ‘재발 방지’를 약속하지만 95년의 교훈을 살리지 못한 채 그 뒤에도 흉악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이번 사건에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용의자가 범행 일부를 인정했음에도 피해자가 고소를 취하해 오키나와 지검이 불기소 처분을 한 점이다. 강간은 형사상 ‘친고죄’이기에 피해자가 고소하지 않으면 기소할 수 없다. 그러면 피해자인 소녀는 왜 고소를 취하했는가? 그 이유로 우선 추측할 수 있는 것이 소녀 가족들의 정신적 고통이다. 이 사건 뒤 주간지들과 일부 신문 등은 피해자에게 잘못이 있는 듯이 보도했다. 성폭력 범죄 때 가해 남성에게 전면적으로 잘못이 있음에도 피해 여성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여성을 추궁하는 것을 ‘두번째 강간’(세컨드 레이프)이라고 한다. 피해 여성의 인권에 무심한 일본 언론의 보도 태도 때문에 피해자의 목소리가 압살당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분노를 금할 수 없다.

더구나 평소 비판적인 의견이나 운동을 ‘반일적’이라며 문제삼고 ‘애국자’인 척하던 언론마저 이런 때 압도적 강자인 미군 편을 드는 것을 보고는 질려서 할말을 잃었다. 이것은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10월 히로시마에서 이와쿠니 기지 소속 미 해병대원 4명이 일본인 여성(19)을 집단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이 기지 안에 있는 용의자들에 대해 강제수사를 하지 않아 히로시마 지검은 결국 11월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이때 “미성년자가 밤에 유흥가를 어슬렁거리는 것도 문제”라며 되레 피해 여성을 꾸짖는 발언을 한 사람이 바로 히로시마 지사였다.

90년대 후반 일본의 보수 매체·학계에서는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피해자라고 이름을 밝히고 나선 한국의 할머니들에 대해 ‘두번째 강간’이라고밖에 얘기할 수 없는 ‘집단 몰매’가 맹위를 떨쳤다. “상행위로 돈을 받은 주제에”라거나 “돈이 필요해서 피해를 날조하고 있을 뿐”이라는 등 차마 듣기 어려운 언어 폭력이 피해자들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이 집단 몰매 때문에 결코 적지 않았을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가 나서지 못하게 되고, 그 목소리는 봉쇄되고 말았다. 이런 공격이 성폭력 피해자에 침묵을 강요하는, 가중된 폭력이라는 인식을 상식화할 필요가 있다.

오키나와에서 발생한 이번 사건에 대해 미국과 일본 두 정부는 비교적 신속히 대응해 “이런 사건을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고 ‘약속’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되풀이돼 온 ‘구두선’을 믿을 오키나와 현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런 약속은 사태가 ‘기지 철수’ ‘안보 반대’로 발전하는 것을 막고자 뚜껑을 덮으려고 하는 필사적 움직임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번 이 자리에서 썼듯이 오키나와를 희생으로 삼아 유지돼온 미-일 안보체제, 시민의 희생에 개의치 않은 채 존재해 온 주일 미군기지, 그 자체를 다시 캐묻는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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