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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13 19:53 수정 : 2008.05.14 21:51

저우창이/중국 월간 <당대> 편집인

세계의 창

중국인들은 ‘산보’할 때 대부분 팔자걸음을 한다. 또 뒷짐을 지거나 팔짱을 낀다. 보기엔 어떨지 모르지만 여유가 느껴진다. 만약 그 보폭이 크고, 손을 높이 들고, 소리를 지른다면? 게다가 서너 사람이 무리를 지으면 산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위’다.

사람들이 시위를 하는 것은 어떤 집단적인 요구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중국인들은 대체로 내성적이고 심리적으로 억눌려 있어 일단 시위에 나서면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다. 심지어 폭력적이 되기도 한다. 1989년 천안문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을 때 사람들은 모두 비분강개했고, 혈기로 들끓었다.

그 뒤로는 이렇다 할 정치적 시위가 발생하지 않았다. 나라가 부흥하면서 ‘정치적 염원’을 표현하는 시위는 거의 사라졌다. 미국 미사일이 유고슬라비아 주재 중국대사관을 오폭했을 때 중학교 교장들이 학생들을 인솔해 시위를 일으켰던 게 그나마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이 시위를 하지 않는 것은 염원이 없어서가 결코 아니다. 정치적이진 않더라도 ‘경제적인 염원’은 있다. 더욱이 정부는 시위를 허락하고, 헌법은 공민의 시위할 권리를 보장한다. 물론, 공공질서와 안전을 위해 시위를 하기 전에 공안기관에 신청서를 내야 한다. 허가를 받은 다음엔 공안기관이 정한 시간과 노선에 맞춰 시위를 진행한다.

여기엔 약간의 문제가 있다. 공민의 시위는 무죄이지만, 그들을 조직해 시위를 주도한 이들은 꼭 그렇지 않다. 그들에겐 ‘혹시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정부를 전복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따라붙는다. 그러니 토지를 빼앗긴 농민이나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 월급을 받지 못한 농민공들이 감히 시위를 하겠다고 나서지는 못한다. 결국 농민공이 밀린 월급을 달라며 투신자살을 시도하는 극단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최근 들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환경오염의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권리의식도 많이 높아졌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지혜 또한 훨씬 나아졌다. 산보는 바로 그들의 발명품이다.

지난해 푸젠성 샤먼의 주민들은 환경오염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대형 화학공장 건설을 반대했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시정부 광장에 모이는 시간을 정했다. 그러나 그들이 광장에서 한 것은 시위가 아니라 ‘산보’였다. 지난 1월엔 상하이에서 산보가 벌어졌다. 자기부상열차가 지나는 노선 주변의 주민들은 전자파 우려를 제기하며 산보를 조직했다. 이들 또한 인터넷을 통해 시간을 정하고 번화가인 난징로에 모였다.

이들의 산보는 매우 특별했다. 이들의 염원은 시위대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행동은 사뭇 달랐다. 무리를 이끄는 지도부도 없었고, 구호가 적힌 팻말을 든 이도 없었다. 큰 함성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다니며 쓰레기를 주웠다. 이러니 누가 그들에게 반정부 시위라는 혐의를 씌울 수 있었겠는가?


산보는 점점 보편화하고 있다. 처벌당할 걱정을 할 필요 없이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드러운 방식의 의견 표출은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만, 공공의 질서를 깨뜨리지는 않는다. 정부의 반감을 사지 않기에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유리하다.

중국인들은 산보를 통해 시위를 배우고 있다. 머잖아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듯이, 산보라는 방패막이를 사용하지 않고서도 정정당당하게 시위를 신청하는 날이 올 것이다. 시위가 공민의 염원을 표현하는 문명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정부와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우창이/중국 월간 <당대>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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