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4.20 20:10
수정 : 2008.04.20 20:10
|
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 교수·철학
|
세계의창
일본에서 ‘야스쿠니 문제’가 재연되고 있다. 중국인 리잉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야스쿠니 YASUKUNI>가 상영 중지로 내몰린 것이다. 산둥성 출신의 이 중국인 감독은 1989년 일본으로 건너왔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참배로 격렬한 마찰이 일어나기 이전인 1997년부터 야스쿠니 신사에 관심을 가지고 10년에 걸쳐 이 작품을 촬영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일본예술문화진흥기금과 한국 부산영화제 아시아다큐멘터리 네트워크기금을 받아 제작됐다.
“반일 영화에 공적 지원금을 지급한 것은 이상하다”는 취지의 주간지 보도가 사태의 발단이 됐다. 한 자민당 의원이 ‘지원의 타당성’이나 ‘내용의 객관성’을 검증한다며 공개 전에 보여줄 것을 요구해, 의원 대상 시사회가 개최됐다. 우익단체들의 상영중지 압박과 항의가 잇따랐고, 여러 영화관들이 상영을 중지했다. 반면, 우익의 협박에 따른 상영중지는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위험한 행동이라는 반발도 제기돼, 지방 영화관 20곳에서 새롭게 상영을 결정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디브이디로 영화를 봤다. 내용 평가는 제쳐놓고, 공개 전에 국회의원이 개입해 영화 상영에 영향을 준 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인 표현의 자유를 해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의원은 “표현의 자유는 소중하다. 압력을 가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면서 객관성과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자기모순을 이해하기 어렵다. 객관성이나 정치적 중립을 추구하는 것도 표현의 자유이지만 자신과 다른 정치적 의견을 표출할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 게 되지 않는다. 정치적 중립이나 객관성만이 요구되는 곳에는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태는 더 복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다른 자민당 의원의 국회질의가 또다시 문제를 낳았다. 영화 <야스쿠니 YASUKUNI>의 주요한 등장인물인, 야스쿠니도(야스쿠니에서 만들어진 일본도)를 만든 장인이 자신이 출연한 부분을 영화에서 삭제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그는 발언했다. 주요한 등장인물이 작품에서 영상 삭제를 요청한 것이 사실이라면, 상영 이전에 작품 자체가 성립되지 않게 될 우려가 있다. 이 영화 상영에 우익 의원이 다시 한번 개입한 것이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표현의 자유를 지키도록 촉구한 각 신문의 사설과 문화인·노동조합 등의 성명이 많이 나온 것은 한편으로 다행스럽다. 다만, 나는 이전에 ‘일본군 성노예를 재판하는 여성국제전범법정’을 다룬 <엔에이치케이> 방송 프로그램이 마구 뜯어 고쳐진 사건이 떠올라 의문을 느낀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방영 전에 국회의원이 방송사 간부에 압력을 가한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나중에 총리가 된 아베 신조 관방부 장관과 나카가와 쇼이치 경제산업상을 압력을 행사한 인사로 지목했다.
그런데 다른 신문을 비롯한 여러 언론사는 ‘정치적 압력’의 유무를 다루기보다는 <엔에이치케이> 대 <아사히신문>의 구도로 문제를 바꿔치기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 결과 각계의 항의도 이번보다 약해지게 됐다. <엔에이치케이> 사건에서는 당시 대북 강경파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강력한 위세를 떨쳤던 아베와 나카가와 등 정부 권력의 중추에 있던 의원들이 상대였다. 반면, 이번에 문제를 제기한 의원은 초선이거나 재선 여성의원이다. 또 후쿠다 야스오 총리 등도 상영 중지에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이번에 항의의 목소리가 컸던 것이 상대를 만만하게 본 결과라고 한다면, 오히려 한심스런 일이 아닌가.
다카하시 데쓰야/도쿄대 교수·철학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