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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5.07 21:34 수정 : 2009.05.07 21:34

홀거 하이데 독일 사회경제행위연구소장

세계의창

최근 독일의 좌파 일간지 <타게스차이퉁>(이하 <타츠>)이 창간 30돌을 맞았다. 올해 이 신문의 창간 기념일은 모든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1960년대 후반 서유럽의 많은 나라에서는 2차대전 이후 권위주의 정치를 끝장내려는 ‘68운동’이 있었다. 독일에선 전후 첫 경제위기, 양대 정당인 좌파 사회민주당과 우파 기독민주당의 첫 대연정에 대한 반발이 기폭제가 됐다. 군소정당의 의석 비율이 채 10%도 안 되는 의회는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장소로선 쓸모가 없었다. 68운동이 ‘의회 밖 야당’이 됐다.

1970년대엔 반핵 운동과 환경 운동을 비롯한 새로운 급진 좌파 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됐다. 68세대는 ‘포디즘’ 시대의 종언을 상징하는, 경제·도덕적 위기에 대한 비평을 시도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조직한 대안 프로젝트 안에서 협동 정신과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형태에 기반한 자기들만의 일터를 조직하려 했다. 불법 점유로 마련한 삶터를 지키거나 핵발전소 건립에 맞서기 위해 수만명의 활동가들이 모였고 이런 운동은 폭력투쟁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다양하고 생생한 사회운동을 배우고 발전시켜 나갔다.

대중운동은 1976년 말 거의 10만명이 참가해 핵발전소 건설 터를 점거하려 했던 ‘브로크도르프 투쟁’에서 정점을 이뤘다. 그러나 이 투쟁은 중무장한 경찰에게 패배하며 끝났다. 공식 조직이 없는 운동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비무장 대중운동의 무력함에 대한 대안으로 테러조직 ‘적군파’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서독 정부는 특수부대를 투입하고 언론의 자유 등 기본권까지 제약하면서 강경하게 대응했다.

브로크도르프 투쟁이 남긴 교훈은 대안언론 확보와 의회 진출 운동에 힘을 실었다. 휴대폰이 없고 인터넷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활자 매체가 큰 구실을 했다. 당시 대안매체 중 주간지 <서프레스트 뉴스>는 독보적이었다. “사람들이 자각하게 하고, 활동가들이 지배담론이 아닌 자신들의 말을 하게 하자”는 게 그들의 정신이었다.

1978년 서베를린에서 1만5천명이 참여해 사회운동의 미래 구조를 논의한 ‘튜닉스 컨벤션’에서는 녹색당 창당 프로젝트뿐 아니라 새로운 대안매체 창설도 논의됐다. 그 결과, 문자 그대로 ‘매일 뉴스’란 뜻의 <타게스차이퉁>이 1979년 봄 창간됐다. 수많은 도시에서 지원단체가 생겨났다. 장기적 관점에서 <타츠>는 제도권 매체의 경쟁자는 되지 못했다. 신문은 부족한 최신 뉴스 대신 사건의 배경을 추적하고, 환경, 성(젠더), 지구촌의 남북 갈등, 대안적 삶과 노동 등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들을 대중과 공유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기의 급진적 평등주의 원칙이 바뀌고 위계조직이 생겨났지만 ‘자조자립’ 원칙은 유지됐다. 급여는 사회 평균 수준보다 훨씬 낮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문은 경제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창간 초기 자금은 7천명의 창간독자들로 구성된 ‘타츠의 친구들 연합’이 기부한 종잣돈으로 마련돼 외부 자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열성 독자들의 의식과 책임감 덕에 수년간의 심각한 재정 위기를 어렵게 극복해온 <타츠>는 지금도 남아 있는 초기의 창간 정신에 기대어 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1992년부터 <타츠>는 800만유로의 자본을 증자해 8천명 주주조합의 소유가 됐다.

<타츠>는 전문성과 효율성을 키우면서 68운동과 연결된 탯줄을 조금씩 잘라내 왔다. 이는 이 신문이 ‘저항’과 ‘융화’ 사이에서 더 성숙한 독립으로 나아가는 구조적 과제를 반영하는 것이다.


홀거 하이데 독일 사회경제행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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