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8.16 21:56
수정 : 2009.08.16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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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진 바흐다트 뉴욕 배서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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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서 선거부정으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현 대통령이 재선되고 60여일이 지났지만, 집권세력의 희망과 달리 위기는 깊어졌다. 첫 몇 주간 시위는 거의 100만명이 거리로 몰려나왔고 극단적 탄압을 받았는데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란 정권은 거리에서 빚어진 충돌과 수감 과정에서 최소 수십명이 숨진 데 책임을 져야 한다.
총에 맞아 숨진 26살의 네다 아가솔탄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이란인들의 부르짖음을 알리는 국제적 상징이 됐다. 아가솔탄 같은 이란인은 훨씬 많다. 아버지가 아마디네자드를 지지하는 보수진영에 속하는 청년조차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숨졌다. 거의 2000명의 저명 개혁파 지도자와 기자, 인권활동가 등이 6월 중순 시위가 시작된 이후 수감됐다. 정권은 관영 텔레비전에 생중계된 공개재판에서 강요와 고문으로 받아낸 게 뻔한 ‘자백’을 내보냈다.
사실 지난 3주간 위기는 새로운 차원을 띠게 됐다. 집권 보수파 고위층 안에서 긴장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일부 보수 의원들과 정치인들은 사돈을 부통령으로 임명한 것 등 아마디네자드의 행동을 비난하거나 반대해 왔다. 긴장 관계는 아마디네자드가 최고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서면 지시를 받고도 언론에 공개될 때까지 인척의 해임을 거부하면서 깊어졌다.
집권층은 시위대가 정부 전복을 위한 벨벳혁명을 계획했다고 주장하지만, 정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민주적 저항에 맞서 쿠데타를 벌였다고 하는 게 더 합리적이다. 이 쿠데타는 1953년 일어난 쿠데타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당시 이란 국왕은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협력해 영국과 서방에 빼앗긴 석유의 국유화를 추진한 모하마드 모사데크 정부를 전복시켰다. 쿠데타 직후, 국왕은 수많은 모사데크 지지자를 체포해 공개재판에 회부했다.
게다가 이란 국왕은 미국의 긴밀한 지원을 통해 독립적 신문과 정당을 폐쇄하고 반대 여론을 억압하면서, 모사데크 총리 밑에서 활기를 찾았던 초기 시민사회를 질식사시키는 체계적 프로그램 가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1953년 쿠데타와 현 쿠데타의 유사점은 여기까지다. 1953년 이란 시민사회는 대단히 작고 취약했다. 오늘날 시민사회는 규모도 상당하며 강력하고 복잡하다. 역설적이게도 1979년 이란혁명과, 8년간 대량살상을 치른 이라크 전쟁의 결과, 자신들의 이익과 시민의 권리를 열렬히 추구하는 신중산층이 성장했다.
이들은 권력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고, 민주적 권리가 제도화되고 존중되기를 요구한다. 다른 한편, 세계는 1953년 이후 크게 바뀌었다. 인터넷, 위성방송, 트위터 등 대중매체의 발달로 국민들을 속이기는 쉽지 않다. 수백만명의 해외 이란인들 역시 정보를 입수하거나 이란 내부의 목소리를 세계로 알리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러나 이란 핵 프로그램에 관한 서방의 우려는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다. 미국과 서방 동맹국들은 핵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실패할 경우 강력한 경제적 제재를 거론해 왔다. 하지만 최근의 역사는 경제적 제재가 정반대 효과를 낸다는 것을 보여 왔다. 공격적 정권을 더 자급자족적으로 만들어 강화시키고, 시민사회는 약화시켰다.
반면 정치적 제재는 정권에 국내외적 태도를 바꾸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다. 고위 관리들의 외국여행을 막고 국외자산을 동결함으로써, 서방세력은 이란 시민사회를 목 조르지 않으면서도 정권에 압력을 가할 수 있다. 강력하고 활기찬 시민사회만이 이란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파르진 바흐다트 뉴욕 배서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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