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8.24 21:32
수정 : 2009.08.24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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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 로드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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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업가가 장관의 사무실로 들어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장관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에게 커피 한잔을 대접하면서 정부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할까? 아니면 정부는 기업에 호의를 베푸는 곳이 아니라는 원칙 아래 그를 내쫓아야 할까?
이런 질문은 정책 결정자와 경제학자들에게 잉크 얼룩 같은 도형을 해석하게 해 사람의 성격을 판단하는 로르샤흐 검사라 할 수 있다. 한쪽엔 국가와 기업을 완전히 분리해야 한다고 믿는 열광적 자유시장주의자와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이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정부는 명확한 규율과 규제를 세우되 기업들이 망하든지 스스로 헤쳐나가든지 놔둬야 한다. 이 관점은 애덤 스미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전통이며, 오늘날의 경제학 교과서에서도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또한 미국과 영국, 그리고 다른 앵글로아메리칸 사회에서 여전히 지배적인 관점으로 통용된다.
다른 한편에선 코퍼러티스트(협동조합주의자) 또는 신중상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정부와 기업의 동맹이 경제적 성취와 사회 조화에 중요하다고 본다. 경제는 기업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국가를 필요로 하고, 필요할 경우 정부가 기업에 인센티브와 보조금과 다른 특혜를 제공해 상업활동의 바퀴가 부드럽게 굴러가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17세기 중상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훨씬 더 오래된 전통을 반영한다. 중상주의자들은 국가가 수출을 장려하고, 완제품 수입을 억제하고, 기업가와 군주를 부유하게 할 수 있는 무역 독점체를 설립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들은 오늘날 아시아의 수출 초강대국들의 경험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애덤 스미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본주의의 이 두 가지 모델 사이의 이론 전투에서 확고하게 승리했다. 그러나 실제 경제현장은 이보다 더 모호하다. 1950~60년대 일본, 1960~80년대 한국,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중국은 고속성장국이다. 이들 세 나라는 모두 적극적인 정부와 대기업이 밀접하게 협력해왔다.
초기 중상주의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16~17세기 국제무역의 대대적인 팽창이 국가의 독점 면허와 같은 인센티브 없이도 가능했을 것이란 가정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18세기 중반 영국이 산업혁명을 개시한 것은 중상주의로 얻은 무역이익과 네트워크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악영향이 뻔한 중상주의를 이상화할 순 없다. 중상주의는 정부가 경제성장 대신 지대 추구와 정실주의에 빠지도록 하고, 그 결과 기업가들의 주머니만 불려줄 수 있다. 무역흑자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무역 당사자간 갈등을 유발한다.
게다가 일방적인 중상주의가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중상주의 중국과 자유주의 모델의 미국간 무역 관계는 천상의 결혼생활처럼 보였지만 파경에 이르렀다. 그 결과, 중국은 경제전략에 중대한 변화를 꾀해야 한다.
그럼에도 중상주의 사고방식은 정책 결정자들에게 일부 중요한 이점을 제공한다. 중상주의는 민간 경제활동이 직면한 걸림돌과 기회에 대한 원활한 피드백을 제공한다. 또 경제적 목적에 대한 국가적 목표의식을 형성해준다.
국가-기업간 밀접한 관계의 이점을 보지 못하는 것은 현대 자유주의 경제학의 맹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가 실제 생산자와 혁신가들이 있었던 메인스트리트(제조업)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검증되지 않은 경제이론들이 어떻게 효율적 시장과 자기규제에 대한 상식을 대체하고 금융산업이 헤게모니를 구축할 수 있게 했는지를 보여준다.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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