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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8.26 21:20 수정 : 2009.08.26 21:20

셀리그 해리슨 미국 국제정책센터 선임연구원

나는 1969~70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을 자주 만났다. 그때도 그는 통일을 향한 첫걸음으로 남과 북의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 방안을 이야기했다.

나는 (<워싱턴 포스트>의 동아시아 특파원으로) 71년 한국 대선을 담당했고, 유세장에 모인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을 생생히 기억한다. 유세 기간에 그는 북한과의 화해를 부르짖었다. 그때 많은 외신기자들이 “선거가 광범위한 부정으로 얼룩졌고, 공정한 선거가 치러졌다면 김대중이 이겼을 것”이라는 기사를 보냈다. 나도 그중 한 명이다.

대선 패배 뒤, 미국 망명 기간 동안 그와 연방제에 대한 많은 토론을 할 수 있었다.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의 연방제 제안에는 ‘남북한 군대의 통합’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디제이도 비현실적이라며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북한의) 연방제 제안 대신 두 군대를 현 상태로 두는 ‘느슨한 연방제’를 북쪽에 제안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통해 두 체제가 좀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디제이는 남과 북의 인구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에 동일한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고 했다. 87년 8월15일 연설에서 그는 ‘독립국가 연방’을 꺼내들었다. 두 체제가 각각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연방이 제한된 권위와 기능만을 수행하는 개념이다. 89년 9월 노태우 대통령이 제안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도 이 개념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성명에도 들어 있다.

디제이는 연방제를 얘기하는 데 극도로 조심했다. 98년 5월2일, 나는 그에게 ‘왜 취임연설에서 연방제 방안을 언급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말했다.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선 남한내의 대중적 지지를 얻는 게 우선되어야 한다. 그 첫 임무는 강경보수파로 둘러싸인 남한내의 정치세력·관료·언론을 극복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사람들은) 통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디제이를 만난 사흘 뒤, 나는 김영남 북한 외무성 부상을 만났다. 그는 “김대중은 다를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실망했다. 취임 이후 (지금까지) 연방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다 똑같다”고 말했다.

99년 5월4일, 나는 디제이에게 “연방제에 대한 침묵이 북한내 강경파들을 강화시키고 있다. 비록 만족할 만한 결과를 못 얻더라도 연방제 논의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디제이는 또 이런 말도 했다. “북한은 안보 불안감이 너무 커 아직 연방제라는 새로운 방식의 리스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보단 먼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원한다”라고.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남북관계는 여전히 북-미 관계에 의존한다. 남한은 선택해야 한다. 미국의 세계정책, 미국의 핵 헤게모니 아래 영원한 종속변수로 남을 것이냐, 아니면 한반도 통일에 우선순위를 둔 디제이의 길을 존중할 것이냐다. 비핵화는 정상화의 전제가 아니라, 정상화 이후에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

비록 디제이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비난했지만, 그는 통일한국이 지금의 일본과 똑같은 선택권을 가지길 원했다. 92년 5월1일, 디제이가 야당 지도자일 때 그는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이 통일됐을 때, 우리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핵연료 재처리 시설 설치를 허락해 줄 것을 요구할 것이다. 왜냐하면 (핵협정에 있어서) 미국과 일본 사이에 맺은 협정과 우리가 아무런 차별이 없어야 한다. 통일이 되면,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도 상황이 변했다는 걸 이해하리라 믿는다”라고.

셀리그 해리슨 미국 국제정책센터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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