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 로드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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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가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1400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지원받기로 함에 따라 숨통이 트였다. 그 결과가 어떻든, 그리스의 대실패는 유럽연합에 타격을 주었다. 그리스 위기는 ‘세계경제의 트릴레마(삼자택일의 딜레마)’의 또다른 징후다. 즉 경제적 글로벌화, 정치적 민주주의, 국민국가가 서로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동시에 두 가지만을 가질 수 있다. 민주주의는 세계화를 제한할 때에만 국민주권과 양립할 수 있다. 국민국가를 유지하면서 세계화를 추진하면 민주주의는 포기해야 한다. 또 세계화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원한다면 국민국가는 제쳐두고 더 폭넓은 국제 거버넌스를 추구해야 한다. 세계경제 역사는 이런 트릴레마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14년까지 세계화의 첫 시기는 경제 및 통화정책이 국내 정치의 압력으로부터 단절돼 있는 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일단 선거권이 확대되고 노동계급이 조직화되고 대중정치가 정착하면, 국내 경제 목표는 외부의 규칙 및 제약과 경쟁하게 된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영국이 1차대전 이전의 세계화 모델인 금본위제를 재건하려던 시도는 리플레이션(통화재팽창)을 요구하는 국내 정치적 압력으로 1931년에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의 설계자들은 민주국가들이 독립적인 통화·재정정책을 요구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자본이동을 주로 장기대출 형태로 제한하는 ‘약한’ 세계화를 고안했다. 브레턴우즈 체제를 설계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자본통제를 글로벌 경제의 임시방편이 아니라 항구적인 요소로 봤다. 그러나 브레턴우즈 체제는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거대한 자본이동을 통제하지 못하면서 1970년대에 무너졌다. 트릴레마의 세번째 경우(세계화+민주주의)는 국민주권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이 경우, 개별 국가들의 정치적 통합을 통해 경제적 통합과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다. 국민주권의 상실은 민주정치의 국제화로 보상된다. 연방제의 세계화 버전을 생각해보라. 예컨대 미국은 연방정부가 개별 주들로부터 충분한 정치적 통제권을 확보한 뒤 국내에 단일시장을 창출했다. 현재 유럽연합의 어려움은 세계 금융위기가 그와 비슷한 과정이라는 현실에서 기인한다. 유럽 지도자들은 경제통합을 위해선 정치적 지지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영국 등 몇몇 나라는 유럽연합에 권한 양도를 최소화하려 한다. 유럽의 정치통합은 경제통합보다 훨씬 뒤처져 있다.
독일과 프랑스 정부는 그리스 예산정책에 대해 거의 발언권이 없었다. 신용평가사들이 그리스의 신용등급을 유지하는 한, 그리스 정부가 유럽중앙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 그리스가 채무 불이행을 선언해도 은행들이 그리스 채무자들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거나 자산을 압류할 수도 없다.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하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금융위기가 훨씬 깊은 것으로 밝혀졌고 해법도 복잡하다는 것을 뜻한다. 유럽의 금융위기는 세계화에 정치적 전제조건들이 얼마나 요구되는지를 드러냈다. 유럽연합이 직면한 선택은 세계 다른 지역이 당면한 것과 동일하다. 정치적 통합을 공고히 할 것인가, 경제적 통합을 완화할 것인가. 금융위기 이전만 해도 유럽은 최초로 더 큰 정치적 통합으로 성공적으로 이행하는 가장 그럴듯한 후보로 보였다. 지금 유럽의 경제는 누더기 상태가 됐고 정치적 통합을 재점화할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 최선은 유럽이 그리스 사태로 노출된 (정치통합이라는) 선택을 더는 늦출 수 없을 것이란 점이다.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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