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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6.15 19:47 수정 : 2010.06.15 19:47

울리히 벡 독일 사회학자

유럽이 불타고 있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수십억유로 규모의 구제금융이라는 ‘소화기’를 그리스 정부에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금융위기는 이제 유럽 자체의 존재위기로까지 번지고 있다. 유럽 각국 정부가 ‘위기를 활용하지 않은 채 그냥 흘려보내지 말라’는 유럽 정치의 근본원칙을 간과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번 위기야말로 정치적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고 유럽을 더욱 튼튼한 존재로 만드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임에도 말이다.

유로화 도입 당시 수많은 경제학자들은 정치연합을 이루지도 않은 채 통화공동체부터 출범시키는 것은 마치 수레를 당나귀 앞에 매어두는 꼴이라며 경고를 쏟아낸 바 있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던 게 하나 있었으니, 다름 아니라 애초의 의도가 정확히 바로 그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로화는 세계적인 대혼란의 시대에 안정성을 보장해줄 믿음직한 축으로 여겨졌다. 설령 유럽연합이 존재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아마도 유럽연합은 유로화의 붕괴를 막기 위해 지금 발명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의 핵심은 메르켈 정부가, 황색신문의 그리스 사냥이, 그리고 사법당국과 지식계층 엘리트들마저 마치 독일을 유럽으로부터 보호하고, 시샘 많은 유럽 이웃나라들의 부당한 침탈로부터 독일의 성공모델을 지켜내야 하는 시간이 찾아온 양 독일의 일국주의적 이해관계를 곡해하고 강조하고 나선다는 데 있다.

모든 나라가 서로 얼마나 촘촘히 얽혀 있는지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예컨대 독일의 은행들이 그리스 국채를 손에 움켜쥐고 있지 않나. 히포리얼이스테이트가 80억유로, 코메르츠방크가 30억유로, 포스트방크가 13억유로를 쥐고 있고, 수많은 주은행(란데스방크)들, 저축은행(슈파르카세), 협동조합은행들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은행들이 미로처럼 한데 얽힌 상황은 프랑스 은행들의 경우 훨씬 더 심각할 정도다. 누군가 그리스, 포르투갈 등등을 ‘실패한 나라’로 낙인찍는다면, 그와 동시에 그 스스로 파산 직전의 은행들을 구제하기 위해 수십억유로를 쏟아부어야만 할 처지다. 어떤 나라가 파산에 이른다면, 곧장 다른 나라마저 그 꼴에 처할 위험에 빠지는 형국이다.

긴급 상황에서 독일 총리가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어깨를 맞댄 채 비로소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다. 사실 앙겔라 메르켈은 앙겔라 ‘콜’도, 앙겔라 ‘브란트’도 아니다. 그는 단지 앙겔라 ‘부시’일 뿐이다. 조지 부시 2세가 테러에 맞서는 전쟁이라는 미국의 일방주의를 나머지 세계에 강요하기 위해 테러 리스크를 활용했듯이, 앙겔라 ‘부시’ 역시 독일의 안정성 정책을 나머지 유럽 나라들에 강요하기 위해 유럽의 금융 리스크를 이용했을 뿐이다.

과거 독일 마르크화(DM)는 독일 패권을 상징하는 통화였다. 이제 유로화가 그런 지위에 올라야 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붕괴 위협을 받고 있는 유로화에는 독일의 ‘마르크화 민족주의’가 뒤늦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리스에 대한 원초적 사냥에서 잘 드러나듯이, 민족주의적 정책의 유령은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독일 유로화’(DE)를 향한 메르켈 총리의 행보는 더 큰 맥락과 잇닿아 있다. 경제건 대외정책이건 혹은 독일 군대의 외국주둔 문제이건 간에 독일 총리가 대내적으로 하나의 민족국가를 강조하고 나설 경우, 이 말은 곧 프랑스인들이 말하듯이 ‘스스로 퇴보하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것은 빈약한 대내수요와 끊임없는 무역흑자라는 의미에서 기껏해야 “확대된 스위스” 혹은 “축소된 중국”을 자신들의 미래로 선택하는 독일이며, 2차대전 이후 독일 헌정사의 의미를 자기중심적인 민족국가라는 방향으로 재정의하는 독일, 그리고 이와 함께 결국엔 유럽의 ‘독일문제’를 다시금 들쑤시고 있는 독일일 뿐이다.


울리히 벡 독일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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