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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7.20 20:29 수정 : 2010.07.20 20:29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경제학

시장 신뢰라는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1848년 <공산당선언>에 쓴 첫 문장을 보고, 각국 정부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에 떨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엔 시장 심리가 돌아서고 국채 스프레드(국채와 시장금리 간 격차)가 커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고 있다. 각국 정부는 설익은 재정 축소를 강요당하고 있다. 많은 정부들이 단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장에 나쁘게 보일 것이라는 이유에서 구조조정 쪽으로 내몰리고 있다.

시장 심리에 대한 공포는 과거엔 빈국들만의 파멸 원인이었다. 1980년대 중남미의 채무 위기나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 동안 엄청난 부채를 짊어진 개발도상국들은 쓴 약을 삼키지 않으면 급격한 자본 유출에 직면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믿었다. 지금은 스페인, 프랑스, 독일이 그 차례가 됐고, 많은 경제분석가들은 심지어 미국도 그 차례가 됐다고 주장한다.

만약 돈을 계속 빌리고 싶다면, 채권자에게 변제능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시장 신뢰가 자체의 생명력을 갖는다. 시장 신뢰는 실물경제적 실체가 없는 묘한 개념이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실재하는 ‘사회적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논리가 단순명쾌하다면 각국 정부가 시장 신뢰에 기반한 행동을 정당화하려 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시장 신뢰라는 게 무엇인가?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는 “지금이야말로 공산주의자들이 전세계를 향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 목적, 경향성을 발표하고 당 강령을 통해 공산주의의 유령에 맞설 시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시장’이 ‘신뢰’라고 하는 것을 명확히 해주고,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시장이 그리할 리 만무하다. 시장을 구성하는 투자자들과 투기꾼들이 한자리에 모여 ‘당 프로그램’을 내놓을 일도 없고, 더 근본적으로는 시장 자체가 해결의 열쇠를 갖고 있지 않다.

부채에 대해 이자를 지급할 정부의 능력과 의지는 현재나 미래의 터져 나올 수 있는 돌발상황의 무한한 경우의 수에 달려 있다. 과세와 지출 계획만이 아니라 경제 상태, 외적 위기상황, 정치적 맥락이라는 매우 불확실한 요인에 달려 있다. 오늘의 시장은 대규모 재정적자가 정부 지급능력에 가장 중대한 위협이라고 보지만, 내일의 시장은 진짜 문제가 낮은 성장이라며 이를 야기시킨 긴축재정을 탓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시장 심리가 변하는 방향을 예측할 사람은 거의 없다. 시장 신뢰라는 척도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경제학자나 정치인들과는 달리 시장은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은 그래도 희망적이다. 시장은 단순히 무언가가 제대로 작동되는 것을 원한다. 부채를 상환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건전한 경제환경을 만드는 것이라면 개의치 않는다.

이 점이 각국 정부가 운신할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 자신있는 정치 지도자라면 미래에 대한 책임을 떠맡고, 시장 신뢰를 따라잡는 것이 아니라 시장 신뢰를 지지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운신의 폭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 정책입안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일관되고 신뢰할 만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시장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유럽의 각국 정부가 계속 시기를 놓친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정치지도자들은 도전에 맞서기보다는 꾸물거렸고, 결국 압력에 굴복하는 식이었다. 시장의 경제분석가들의 말에 끌려다니다가 볼장 다 본 것이다. 대중적 지지를 모을 좋은 기회를 가져다줄 바람직한 경제정책들을 스스로 부정한 꼴이 됐다.

현재의 위기가 더 악화된다면 일차적 책임은 정치 지도자들이 져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시장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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