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6.17 19:15
수정 : 2011.06.17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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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싱 대만 자오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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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대만해협, 남북한 등
동아시아 분쟁의 3대 핵심 쟁점은
우리 공동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
원래는 7월 초에 일본 도쿄에 가서 학술회의에 참석해야 했지만, 후쿠시마 원전 위기로 계획이 엉망이 됐다. 일본한테 이번 위기는 매우 중요한 역사의 전환점이다. 핵물질 누출로 일어난 광범위한 문제는 이미 일본 내부를 넘어 동아시아 지역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면에서 국경을 넘어 공동으로 위기에 대처하려는 노력이 없을 뿐 아니라, 사상적인 면에서도 지역성이라는 시야를 가진 토론이 없다. 이는 이번 위기가 동아시아 사상계에 제기하는 요구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7월 학술회의 개최지가 오키나와로 변경된 것이다. 오키나와가 도쿄를 대체하다니! 내가 보기엔 오키나와야말로 동아시아 지역 문제의 축소판이다.
동아시아 역사를 전체로 보면, 1842년 아편전쟁으로 홍콩을 식민지화한 것이 제국주의가 동아시아로 들어온 중요한 계기이고, 1872년 일본이 류큐를 점령하고 1879년 오키나와에서 ‘폐번치현’(번을 폐지하고 현을 설치함)한 것은 이 지역 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일본은 지역 내에서의 확장 개시를 선포했다. 이어 1895년 중-일(청-일) 전쟁이 끝나면서 대만이 할양되었고, 1910년 조선이 일본제국에 편입되었다.
오늘날 지역 분쟁의 3대 핵심지대(오키나와, 대만해협, 남북한)의 관점으로 동아시아를 보면, 현재의 문제들은 1910년에 이미 지역성을 띤 전체 구조를 형성했으며, 각 문제를 개별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 역사적 구도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2차 대전이 끝난 뒤 쇠약해진 일본제국의 식민통치 권력 기제의 빈틈을 파고든 미국이다. 원래는 동아시아 내부에서 정리할 수 있었던 역사적 분쟁이 미국 신식민주의 세계체제 속으로 넘어갔다. 1972년 일본에 되돌려지기까지 오키나와는 군사통치를 받았다. 다시 말하면, 위에서 말한 3가지 갈등의 쟁점은 모두 2차 대전 이전의 일본 식민주의와 관련돼 있으며, 이후에는 일본과 동맹을 맺은 미국의 신제국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따라서 오키나와 문제는 대만·한반도 문제와 마찬가지로 모두 동아시아 전체 동력의 연쇄고리이며, 단독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반드시 지역사와 세계사의 연결점에서 토론해야 한다.
지난해 6월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총리는 오키나와 기지 이전 문제로 사임했다. 여기에 반영된 것은 일본과 미국의 직접 교섭 실패다. 하지만 가장 풍자적인 부분은 그의 상대가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미국 진보역량을 대표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전세계를 통치하는 미국의 600~700곳 군사기지 중 하나로, 이를 양보하면 미국 군사패권의 전체 구조가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오키나와 문제를 풀려면 반드시 1870년대의 변화를 정리하고, 오키나와 민중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심정에 다가가야 한다. 류큐가 독립왕국으로서 지역에서 고도의 정치적 주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오키나와인들이 지난 140년 동안 정체성과 자아를 정립하는 데 지울 수 없는 작용을 했다. 2차 대전 이후 식민지들이 모두 독립했지만, 이것이 오키나와를 반드시 일본의 식민지로 봐야 하고 독립국가 수립만이 유일한 출구라는 의미는 아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몽골, 신장자치구, 홍콩 특구는 이미 존재하는 전례들이다. 관건은 어떻게 지역 전체의 각도에서 오키나와가 더욱 완전한 존중과 자주를 누릴 수 있느냐다.
오키나와 문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오키나와, 남북한, 대만해협 양안을 동아시아인의 문제, 우리 공동의 문제, 가족의 문제로 생각할 때만 오키나와 문제가 현재의 풀리지 않는 교착상태를 벗어나 진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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