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싱
대만 자오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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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비판세력도 과거 식민지와
사귀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식민의 유령은 사라지지 않았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1990년대 중반 일본의 비판적 진영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을 무렵은 어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얼굴 표정에 어떤 반응이 나타났을지 확인할 수는 없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말해줬던 극소수의 기억 속에, 항일전쟁 시기 아직 젊은 여성이었던 어머니는 산둥 허쩌의 성당에 숨어 있었다. 노년이 되어 당시를 아주 그리워하더니 퇴직 후 한가해지자 세례를 받았다. 주말에 성당에 가면 신부를 따라다니며 봉헌금을 내려 했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하느님의 배려로 살아남은 데 감사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렇게 돌아간다. 지나갔다고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다시 당신을 찾아온다. 그러나 우리 세대는 국민당의 애국교육을 받았음에도 직접 전란시대를 겪지 못해서 오히려 추상적이다. 대만에서 성장하면 일본 침략 이후 여전히 활동하는 친일풍을 만날 수 있다. 이 두가지 서로 밀고 당기는 역량의 포위로 ‘일본’은 항상 특별한 색채를 띠게 된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설명하기 어려운 애증의 정서를 띠고 있다. 다른 세대 간의 차이는 서로 이해하기 힘들지만, 어머니는 내가 자주 일본을 드나든다는 걸 알았으면 말로 저지하지 않더라도 속으로 아마 항상 애태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실제 일본 경험은 위에 언급한 대만의 두가지 역량과 교차하지 않는다. 20년 가까운 왕래는 모두 이른바 진보 혹은 좌파의 친구와 나눈 것이다. 그들과의 사이에는 많은 공동의 고뇌와 초조가 있다.
일본의 문학평론가가 1930년대 베이징에서 느낀 감탄에 대해 읽었을 때와 같다. 이웃과 비슷한 사상과 곤경을 공유하는 것은 유럽·미국에서는 느끼지 못했을 연대감이다. 미조구치 유조 교수가 살아있을 때 그와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도쿄 지식계와 교류한 경험은 나로 하여금 일본의 정신상태가 사실상 제3세계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아마 이런 의식의 정립이 있어야만 하늘 끝에서 지상으로 올 수 있고, 허무한 신분을 내려놓아야만 일본은 자신을 찾을 수 있고 주변의 침략당한 지역들과 진정한 화해를 이룰 수 있다. 미조구치 선생은 비록 적극적으로 호응하지는 않았지만 생각에 잠긴 채 머리를 끄덕였다. 이런 생각은 당연히 나만의 것이 아니다. 중국 작가 장청즈의 최근작 <존중과 작별- 일본에 바치다> 같은 작품을 읽으면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일본의 이전 세대 문학인은 저 높은 곳에 머물러 있는 듯 느끼게 하며, 자신들이 어찌하지 못하는 모순을 감추고 있다. 내가 사귀는 친구들은 대부분 전후 1세대이고, 대부분 이미 구름에서 땅으로 떨어져 전전과 전후 일본 사회의 위기 문제를 다루려 노력한다.
일본의 많은 친구들은 일본의 역사 경로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를 사고하고, 적극적으로 구체적인 활동에 뛰어든다. 특히 오키나와 연대운동에서 이런 노력이 드러난다. 오키나와의 특수한 역사적 위치와 곤경은 비판적 세력들이 과거를 대면하고 미래를 펼치는 현재의 매개체가 된다. 나 또한 이런 인연으로 오키나와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들의 심정, 장기적으로 임계점의 위기 상태에 처해 있는 그들의 불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키나와를 통해 일본 비판세력 친구들은 그들이 내부 또는 외부의 주체와 상호 공존하는 방식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과거의 식민지와 사귀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 식민지의 역사적 유령은 여전히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벌써 사라진 듯 보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
나는 흔들리는 유령을 타이베이, 교토 또는 오키나와 술자리에 불러놓고 담판할 수 있도록 자신을 천천히 훈련하고 있다. 하지만 어렵다. 항상 실언을 하거나, 모두가 마음의 대화로 들어가도록 하는 현실적 ‘방법’이 없다. 하지만 정면으로 대면해 사고해야 할 문제를 회피하면 정서적으로 자신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만들게 되고, 학문과 지식에서도 드러나게 된다. 최근 몇년 동안 가끔 대만 문학 토론회에 참가하면서 10여년 동안의 변화가 아주 크다는 것을 발견한다. 제1세대 대만 문학자·학자들은 식민지 문제에 대해 정신적으로 곤혹을 느낀다. 그들은 신경을 매우 민감하게 접촉하고 처리한다. 그러면서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관계 정립은 분명하다. 스스로 자신의 몸에서 이 이론과 정치의 감정 관계를 처리할 줄 알고 있다. 하지만 대만 문학이 90년대 중반부터 대대적으로 체제화된 뒤, 일본에서 유학한 박사들이 천천히 돌아와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자리에 들어갔다. 이들이 받은 훈련은 아주 효과적으로 식민지 역사 문제를 객관적으로 ‘전문화’했지만, 대만 문학이 원래 가지고 있던 긴장감 중에 잔존하던 생산성을 모두 상실하게 했다.
일본의 학술체제에서 식민지 대만 문학은 전공상 일본 문학에 흡수됐고, 일본에서 유학한 그들은 일본 문학의 시각에서 대만을 바라본다. 근본적으로 그들이 배우고 이어받은 것은 과거 식민자의 지식 방식과 학술 전통이다. 따라서 피식민자들의 고통과 어려움은 이른바 전문화된 과정에서 연구자 자신의 고통이 아니다. 그들에게 솔직하게 이런 문제를 말해도, 그들은 아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것이다. 아마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학술적이지 않고, 객관적이지 않고, 전문적이지 않고, 너무 정서적이고, 정치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학술연구에 학술은 있되 사상은 없게 되었다. 긴장감의 동력을 뽑아버린 채 누가 깊은 사상을 가진 연구를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이런 문제를 일본의 지도교수에게 말하면, 인신공격성 지적으로 받아들여 당신이 일본 지식 전통의 객관성을 부정하고 학술을 명목으로 정치투쟁을 한다고 여길 것이다.
대만의 학생이 일본에 간 것은 일본의 지식을 배우러 간 것으로, 일본은 여러 시야를 제공할 의무는 없다. 어떻게 경각심을 유지하고 일본 지식의 위치를 반성할지는 유학생의 문제이지 스승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는 위에서 제기한 반성적 방법의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 일본의 학술사상계는 도대체 전(前)식민지·식민지 문제를 다루는가? 자신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전식민지에서 온 학생을 대하는가, 그들에게 어떤 지식을 제공하는가? 일본 학생들에게는 전식민문학과 사상의 곤경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간단하게 말하면, 일본과 전식민지 사람들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전식민지에서 온 지식인과 반성적 능력을 가진 식민 모국의 비판적 지식인은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하는가? 유효한 ‘방법론’을 발견해 냈는가? 이런 말들은 직접적이지만, 나 자신은 답안을 찾지 못했으며 답안이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이다. 단지 식민지 문제는 끝나지 않았으며 토론의 공간을 함께 개척하고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알 뿐이다. 대만의 식민주체성 문제는 단지 대만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중국과 동아시아의 사상계에서 함께 사색하고 정리해야 할 문제이다. 간단하게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깊이 있는 공동 대면의 과정이 없다면 상처는 영원히 아물 수 없으며, 지역 평화의 진전도 거론하기 힘들다. 대만과 일본의 포스트식민 관계에 대한 사색은 또한 한반도의 식민지 경험에 어떤 공명을 만들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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