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08.12 19:13
수정 : 2011.08.12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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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싱 대만 자오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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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도의 사상계가 유럽·미국을
거치지 않고 자주적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는 두 나라를 얼마나 이해하나
2010년 초, 나는 ‘서천(西天)에서 중토(中土)로’ 프로젝트(westheavens.net)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상하이 비엔날레의 틀 안에서 그해 10~12월 상하이 미술관에서 개최된 ‘인도-중국 사회사상대화’에서 이 부분을 진행했다. 현재는 2011년 인도 영상 전시를 중심으로 하는 두 번째 계획에 참여하고 있다. ‘서천중토’는 중국 대륙에서 널리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서로 이웃한 양대 대국으로서 인도와 중국의 사상계는 2차 대전 이후 접촉이 많지 않았다. 1950년대 네루와 저우언라이(주은래) 두 국가 지도자가 손을 잡고 제3세계의 상상을 추진한 것을 제외하면, 사람들의 기억 중 민간에서 상징적 의미가 있는 상호교류는 1920~30년대 타고르의 방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서천중토’의 최대 의미는 두 지역이 비교적 큰 규모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다시 시작한다는 점일 것이다. 오래된 역사 상상을 일으켜 서쪽 천축의 인도를 다시 중국의 시야로 끌어와 학습과 참조의 대상으로 삼게 하려는 것이다.
아시아는 미술계뿐 아니라 전체 학술계 모두 유럽·미국 이론에 대한 자아식민의 늪에 빠져서 헤어나오기 어려운 상황이다. 중국처럼 사회주의 실천을 경험한 대국도 빠른 속도로 사상의 차(次)식민지 함정에 빠졌다. ‘서천중토’ 프로젝트 추진 과정에서 우리는 전체 중국어 세계의 방대한 학술체제에서, 대만·홍콩처럼 작은 규모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대륙에도 인도 현대사회사상에 대한 깊은 연구기구가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내가 보기엔 한국의 상황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어떤 역량이 ‘서천중토’에 대한 열렬한 반응을 촉발시켰는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인도 경제의 굴기가 지식계의 호기심을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줄곧 낙후된 국가로 인식됐던 이 나라가 빈곤과 카스트제도의 지속적인 제약 아래서 어떻게 최근 몇년 사이에 안정적인 성장을 하고 향후 십년 내에 중국을 초월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게 된 것일까? 더욱 큰 흡인력은 인도 학자들의 세계적인 영향력에 비해 중국 학자들이 훨씬 뒤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중국을 방문하러 온 학자들 가운데 호미 바바는 유명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의 학자이고, 파르타 차테르지와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모두 국제적으로 유명한 지식단체 ‘서발턴 연구’의 핵심 성원이다. 테자스위니 니란자나는 유명한 페미니즘 이론가이고, 사라트 마하라지는 현대예술이론의 대가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론이 유럽·미국에서 수입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독창성과 세계에 대한 공헌은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올해 3월 우리는 델리, 뭄바이, 벵갈루루(방갈로르), 콜카타 등 인도 4개 도시를 돌았다. 그들의 생활 공간에서 그들의 사상을 키워낸 토양을 체험했다. 콜카타에서 우리는 벵골 지식전통의 풍부함과 두터움을 느꼈고, 차테르지 교수와 토론하면서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의 느낌을 이야기했다. 인도와 중국의 토론에서 관심사는 유럽·미국과는 큰 차이가 있다. 그곳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 것도 이곳에서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홍콩·대만은 대륙의 주변에 있고, 전후 역사의 분단으로 인해, 우리는 내부이면서도 외부이다. 홍콩에서 자란 선배 예술인 장쑹런과 함께 ‘서천중토’를 추진하면서, 오늘날 중국 대륙은 이미 강력한 힘을 가진 자기장이 된 것을 알게 됐다. 중국은 더욱 적극적으로 무대의 역할을 맡아, 상상력이 있는 지식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의 사상계가 유럽과 미국을 거치지 않고 자주적인 대화를 시작하고 아시아 지역성의 종합을 위해 한발 내딛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따져 물어야 한다. 우리는 내재적으로 중국 대륙을 이해하기 시작할 동력이 있는가? 인도를 이해할 수 있는가?
천광싱 대만 자오퉁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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