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0.07 19:20
수정 : 2011.10.07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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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싱 대만 자오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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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념할 만한 우정으로부터
그는 국경을 초월한 단결과 우정이
완전히 가능하다는 것을 체험했다”
1963년, 도쿄대학 법학부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22살 청년 아사이 모토후미는 외교관의 길에 들어섰다. 방향을 잃고 우울하게 만드는 대학 캠퍼스에서 벗어나, 외무성 파견으로 타이베이에 중국어 공부를 하러 갔다.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그는 냉전기 대만의 삼엄한 사상검사를 피할 수 있었고 계속 공부할 생각으로 마르크스·엥겔스·레닌·루쉰·마오쩌둥의 저작들을 들고 왔다. 그는 대륙에서 혼자 대만에 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리쭤청을 만났다. 중국어 공부를 위해 그는 리쭤청에게 함께 살자고 제안했다. 그 뒤 리쭤청을 통해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천잉전을 만났다. 이후 그가 살던 타이베이 뤄스푸루 3단 25호 집의 거실은 점차 ‘독서회’ 장소가 되었다. 저녁식사 뒤 천은 친구 우야오중, 멍사오, 추옌량 등을 데려왔고, 아사이 집의 서적들은 그들의 양식이 됐다.
아사이는 당시 자신보다 4살 위인 천잉전이 막 명성을 얻기 시작한 작가라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천의 인격적 매력에 빠졌다. 천은 사상이 풍부하고, 말을 잘하고, 잘생겼으며, 지도자 기질이 있었다. 사회주의 중국을 좋아하고 민족통일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1965년 아사이는 발령을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얼마 뒤 천잉전과 독서회 회원들은 체포됐다. 그리고 36명이 반란조직인 ‘민주대만연맹’을 결성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다. 아사이는 조직의 주모자로 지목됐고, 천은 10년형을 받았다. 1975년 장제스(장개석)가 세상을 떠난 뒤 이들은 특별사면을 받았다. 천잉전은 그 뒤 대만의 중요한 소설가·사상가가 됐다.
1988년 아사이는 외교관에서 퇴임해 도쿄대, 니혼대, 메이지가쿠인대, 히로시마시립대에서 가르쳤고 국제관계·일본외교에 대해 20권 가까이 책을 냈다.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청년시절 천잉전과의 교류였다. “나만을 위해서 살지는 말아야 하며, 더 큰 뭔가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대만을 떠난 뒤 야심이 일어날 때마다 천잉전의 그림자가 나타나 나에게 ‘당신 확실히 결정을 내린 건가?’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나의 거울이다.”
1991년 아사이가 다시 대만에 와 출옥한 천잉전과 재회했다. 천잉전은 그를 데리고 타오위안의 묘지에 갔다. 그는 자신보다 10살 많은 오랜 벗 리쭤청을 향해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천잉전은 1992년 <허우제>라는 중요한 회고의 글에서 이렇게 자신을 묘사했다. “한 젊은 일본 지식인(아사이)의 진심 어린, 이타적인 협조를 받아, 그는 지식이 엄격하게 봉쇄된 타이베이에서 중국과 세계에 대한 새롭고 급진적인 지식을 읽을 수 있었다. 이 기념할 만한 우정으로부터 그는 진정으로 평화와 진보를 굳게 믿는 선량한 사람들 사이에 진실하고 엄숙하고 열정적이며 국경을 초월한 단결과 우정이 완전히 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생생하게 체험했다.”
지난 2월 나는 히로시마시립대학 평화연구소에서 아사이 선생을 만났다. 내 초청으로 대만의 학술회의에 참석한 그는 9월16일 타이베이의 웨한당에서 ‘천잉전과 1960년대 대만’이란 제목으로 열심히 완성한 원고를 발표했다. 도쿄에 돌아간 뒤 그는 편지를 보내 이번 대만행으로 한평생 경력의 정점을 마무리했다고 말했다.
9월15일 오후 아사히 선생과 함께 뤄스푸루 3단 25호의 집을 찾아가보니 주소는 그대로지만 옛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그래도 그는 쓸쓸함과 기쁨으로 사진을 찍어 50년 전의 진실한 우정을 기념하려 했다! 나로서는, 어떻게 아사이 선생과 천잉전 일행이 동아시아 역사 과정에서 창조한 국제주의의 연대를 이어가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마음속에서 계속 소용돌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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