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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04 19:18 수정 : 2011.11.04 19:18

나오미 울프 미국 사회비평가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국적이나 종교로 편가르는 대신,
전세계적인 양심으로 뭉치고 있다

미국 방방곡곡에서 경찰이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대의 야영지를 부수고 있다. 최악의 사례는 오클랜드에서 경찰이 치명적일 수 있는 고무탄과 섬광 수류탄, 최루탄 등을 사용한 것이다. 당시 상황을 전하는 트위터 메시지는 마치 이집트 카이로의 타흐리르광장을 묘사하는 것 같다. “저들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수만명의 경찰” “장갑차가 왔다.” 그곳에서 170명이 체포됐다.

나 자신도 체포된 적이 있다. 뉴욕 남부 맨해튼 거리에서 평화적으로 시위할 때였다. 이 경험을 통해 경찰 강경진압의 현실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미국인들은 바야흐로 잠에서 깨어, 그들이 잠자고 있던 사이에 세상이 변해버린 걸 깨닫기 시작했다. 즉, 기업들이 경찰을 고용(제이피모건 체이스는 뉴욕시 경찰재단에 460만달러를 기부했다)하고, 국토안보부는 소규모의 지방경찰에까지 군대 수준의 무기체계를 안겨줬으며, 표현·집회의 자유는 침해되고 있었다.

이 사태를 해석하는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사실이 있다. 새로운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과거의 어떤 전쟁과도 다르다. 사람들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국적이나 종교로 편을 가르는 대신, 전세계적인 양심과 평화적인 삶, 지속가능한 미래, 경제정의, 기본적 민주주의라는 요구로 한데 뭉치고 있다. 그들의 적은 전세계적인 ‘기업 지배체제’다. 정부와 입법부를 매수하고, 자체의 무장 공권력을 갖추고, 제도적인 사기를 저지르고, 국고와 생태계를 약탈하는 그 체제 말이다.

세계 곳곳에서 평화로운 시위대들이 혼란을 일으키는 악마로 몰리고 있지만,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혼란을 전제로 하는 제도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밝혔듯, 익숙한 것에 대한 평화적 전복은 건강한 것이다. 그동안 감춰졌던 부정의를 들춰내 고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저항은 하루아침에 승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점거농성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시위대 스스로 기금을 모으고 변호사를 고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업 지배체제’는 시민들이 법대로 돌아가는 세상을 되찾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또한 지역별로 뜻을 함께하는 유권자 명단을 만들어 정치인들을 압박해야 한다. 반대로 표현·집회의 자유를 존중하는 공직자들은 적극 지원하자. 한 예로, 뉴욕주 올버니에서는 경찰과 검사들이 시위대 진압을 거부한 바 있다.

저항은 그 저항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사회를 닮아야 한다. 남부 맨해튼의 주코티공원에는 도서관과 부엌이 있고,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이 있고, 어린이들이 하룻밤 자고 갈 수도 있으며, 토론회가 열린다. 부패한 도시 안에 새로운 도시를 세워 그 모습이 사회 대다수의 뜻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운동의 요구사항들이라기보다, 우리가 공유하는 본원적 인간성이다. 수십년간 시민들은 (호화로운 소비생활의 환상 속에서든 빈곤과 힘겨운 노동 속에서든) 그저 고개 숙이고 엘리트의 지배에 자신을 맡겨왔다. 사람들은 저항을 통해 스스로 일어나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자유의 습관’을 기억해내며, 새로운 제도와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런 변화는 평화적 시위에 대한 정치적·물리적 탄압의 분위기 속에서는 일어나기 힘들다. 동독 공산당이 1953년 6월 노동자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물었다. “정부가 인민을 해체하고 새 인민을 선출하는 게 더 쉽지 않을까?” 미국 전역에서, 그리고 세계 많은 나라에서 민주적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브레히트의 저 반어적인 질문을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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