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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11 19:25 수정 : 2011.11.11 19:25

천광싱 대만 자오퉁대학 교수

한국이 지난 반세기 동안 보여준
강인한 민중·민주의 역량을
어떻게 역사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1988년 4월 대만의 주요 작가이자 사상가인 천잉전은 그가 85년에 만든 잡지 <인간>의 기자 신분으로 한국에서 2주 동안 취재를 했다. <한겨레>를 비롯해 전민련, 학생운동권, 민족문학작가회의,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교협 등의 주요 인사들을 만났다. 한달 뒤 6월호에 ‘천잉전 현지보고: 불안 속의 한국 민주운동’ 특집기사를 실었다. 혼자서 60여쪽에 걸쳐 13편의 기사를 썼다. 당시 취재에 응한 이들은 오늘날 모두 잘 지내고 있는가?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23년 뒤 이 기사들을 보니 88년 한국 민주화운동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역사적 창문 같고, 타임머신을 통과해온 작가가 우리를 각 운동 현장에 데려가는 것 같다. 흥분이 되면서, 자신의 사회를 사랑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에 연연하지 않고 전진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당시 이미 50살이 넘은 작가가 이토록 방대한 심층취재를 할 수 있게 그를 지탱한 동력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보도의 결말에서 천잉전은 기자의 서술 규범을 넘어 작가의 위치로 돌아와, 한국 민중이 30년간 단련해낸 역량을 느끼는 동시에 대만의 각 분야에서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 한국에 비춰 “부끄럽고 슬프게” 느껴졌다고 탄식했다.

사회주의자로서 사상 문제로 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천잉전은 평생 민족통일을 추구해왔다. 그의 중국 민족주의는 강렬한 좌파·제3세계·국제주의 색채를 띠고 있다. 80년대 대륙의 ‘개혁개방’이 가져온 관료주의·부패·계급분화 등은 그로 하여금 마음속의 ‘홍색 조국’에 대해 많은 불만과 의문을 갖게 했다. 아마 이런 심정을 품고, 참조할 가치가 있는 한국이라는 공간으로 와서 또다른 정신의 집을 발견한 것이리라. 당시 바람이 불고 구름이 피어오르듯 강하게 일어나던 민중운동에서 그의 이념과 일치하는 많은 사상들이 제기되고 추구되는 것을 보았다.

지금 천잉전의 글을 돌아보면, 한국의 상황을 지나치게 미화한 면도 있다. 동시에 우리는 오늘날 한국이 경제발전과 민주운동에서 이룬 성취를 의심할 수 없다. 상대적으로 보면, 대만의 경제발전은 국공내전 뒤 후퇴한 국민당 정부와 떨어져서는 이해할 수 없다. 1911년 쑨원이 설립한 ‘중화민국’은 1949년 중국공산당에 패했지만 당시 약 40년의 집권 경험을 쌓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이에 상응하는 집권 경험을 가진 정권이 없었고, 식민지를 벗어난 황무지와 같은 상태였으며, 설상가상으로 민족분열·내전·독재개발의 길을 걸어나갔다. 하지만 한국과 대만이 비슷한 점은 20년 동안 국가주의, 발전주의, 반공·친미주의를 겪은 뒤 80년대에 점차 각종 형식의 민주운동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한국과 대만 두 지역에서 정당정치 차원의 민주주의는 외부가 학습할 만한 점이 없다. 하지만 두 지역의 민간에서 보여주는 고도의 활력이 사회를 계속 전진시키고 있다. 특히 한국은 80년대의 ‘민주운동’이 90년대 ‘시민운동’의 자양분이 됐고, 지금까지도 아시아와 세계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런 궤적을 보면, 20년 전 천잉전이 심은 한국에 대한 정은 당시 민간의 주체성을 우러러보며 기대한 것이다.

건너뛸 수 없는 문제는 한국이 반세기 동안 보여준 강인한 민중·민주의 역량을 어떻게 역사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과학계의 친구들은 설득력 있는 해석을 내놓지 못했다. 나는 이것이 동아시아 사상계의 공동과제라고 생각한다. 현존하는 지식의 틀과 곤경을 돌파해야만 우리 자신의 역사에 근접하는 답을 찾아내고, 천잉전의 한국정(情)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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