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1.22 18:50
수정 : 2015.11.22 18:50
1972년 남북한이 발표한 7·4 공동성명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을 남북통일의 3대 원칙으로 내세웠다. 여기에서 ‘자주’는 남북한이 통일의 주체임을 밝힌 것이라 하겠다.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 때 이 3대 원칙 가운데 민족 대단결이 민주로 바뀌기는 했지만 어느 정권에서도 자주는 바뀌지 않았다.
그러던 자주가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면서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더니 박근혜 정부에서는 아예 사라진 것 같다. 9월 박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한반도의 조속한 통일을 강조했을 때 시 주석은 중국이 한반도의 자주·평화 통일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재천명하였다. 한국에서는 시진핑이 말한 자주·평화 통일을 ‘한민족에 의한 평화통일’로 번역하였다. 다른 경우엔 자주가 생략될 때도 없지 않다. 자주라는 단어에 유독 민감한 것 같다.
왜일까? 일각에서는 자주가 북한이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구호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북한의 미군 철수 주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7·4 공동성명 때도 주장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명박 전 대통령은 퇴임 직전 인터뷰에서 중국에서 한국 주도의 통일에 대한 논문이나 연구 결과가 많이 발표되고 있다고 하면서 중요한 변화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뜬금없는 소리였다. 같은 해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때 시진핑 주석이 한반도의 자주·평화 통일 지지를 재천명하자 한국 일각에서는 그것이 사실상 한국에 의한 흡수통일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자주·평화 통일 지지도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아전인수식 해석을 한 것이라 하겠다. 결국 한국의 통일 원칙은 이명박 정부 때부터 자리옮김을 하다 이젠 한국 주도의 통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 아닐까.
사실 북한의 3차 핵실험과 장성택 사건 뒤 중국에서 북한을 규탄하는 여론이 들끓고 중-북(북-중)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자 한국에서는 이를 중국 대북정책의 근본적인 전환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거기에다 ‘북한 붕괴론’에 힘입어 이를 한국 주도 통일의 기회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남북한의 통일을 지경학적인 평화통일로 가설할 때 경제력이 북한보다 40~50배 앞선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초기 조건일 것이다. 그런 의미의 한국 주도 통일이라면 어디까지나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의 급변 사태나 북한 붕괴를 기정사실로 가정하고 추진하는 통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7·4 공동성명의 ‘자주통일’에서는 주체가 남북한이지만, 한국 주도의 ‘제로섬’ 통일이라면 통일 주체에서 북한이 빠지는 것이다. 북한을 한국이 주도하는 대로 따라야만 하는 존재로 인식하면 그 통일은 시작부터가 갈등과 충돌이고 결과는 재분열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남북한은 1950~60년대에 모두 통일을 소리 높이 외쳤다.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였다. 남북 서로 자기 주체의 제로섬 통일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냉전이 종식된 뒤부터는 통일 논의보다 남북 화해, 남북 불가침, 남북 교류와 협력이라는 평화 구축이 흐름을 이루어왔다. 그 절정에서 수천수만의 한국인들이 북한을 누비며 북한인들에게 한국을 인식시켰다. 햇볕정책이 변화시킨 것은 남한에 대한 북한의 민심이었다. 통일에 가장 필요한 ‘천심’인 것이다. 거기에는 주변 4강 어느 나라도 ‘태클’을 걸지 못했다. ‘자주’가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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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징이 베이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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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때부터 다시 강조된 통일이 이제는 극치에 이르는 것 같다. 자주가 사라진 때문인지 어느 때보다 강대국들에 지지를 호소하는 것 같다. 물론 백번 필요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근대사 이후 한반도는 강대국에 독립을 애타게 호소한 적이 있는데 결과는 독립이 아니었다. 물론 시대는 다르다. 그렇지만 남북의 자주가 없는 통일은 과연 가능할까. 언젠가 다시 공허한 메아리로 들릴 수 있지 않을까.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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