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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2.20 19:13 수정 : 2015.12.20 19:13

북-중 관계는 냉전 시기 두차례의 큰 진통을 겪었다. 1956년 북한에서 일어난 이른바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가 숙청되던 때와 1960년대 중반 중국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양국이 대립각을 세우던 때가 그때였다. 첫번째 갈등은 1957년 모스크바에서 마오쩌둥과 김일성의 두차례 비밀회동으로 봉합됐다. 두번째는 1970년 저우언라이의 방북으로 봉합됐다. 두차례 모두 언제 그랬느냐 싶도록 금방 관계 개선이 이뤄졌다.

냉전이 종식된 뒤 북-중 관계에는 다시 새로운 진통의 시기가 다가왔다. 1992년 한-중 수교 뒤 겪은 진통과 북한의 3차 핵실험 뒤부터 현재까지 겪고 있는 진통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갈등의 봉합은 냉전 시기와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한-중 수교 뒤의 갈등은 8년이 지난 2000년 김정일의 방중으로 화해 무드로 돌아선다.

작금의 갈등은 지난 10월 류윈산의 방북으로 화해 무드를 타는 듯했고 북한의 유명한 모란봉 악단도 베이징에 왔다. 그런데 모란봉 악단이 공연을 돌연 취소하고 귀국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터졌다. 많은 억측이 난무하지만 한 가지만은 틀림없을 것이다. 양국이 관계 개선의 물꼬를 텄다지만 관계 개선 속도가 냉전 시기 때의 갈등 봉합처럼 빠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냉전 시기 양국 갈등은 주로 양국 차원에서 불거졌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된 뒤의 갈등에는 많은 국제적 요소들이 얽히며 복잡하게 전개되어 왔다. 한-중 수교 뒤의 갈등은 한국이라는 요소, 북핵으로 야기된 갈등에는 더더욱 많은 국제적 요소들이 영향을 미치며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냉전 시기의 북-중 관계는 양국 모두 국가운영 경험이 전무했던 동일한 이데올로기 집단이 정권을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마침 냉전이 시작되면서 양국은 ‘사회주의 대가정’ 개념에 귀속됐다. 거기에 중국의 천하관념과 세계혁명이라는 목표가 중첩되어 북-중 관계는 주권국가 간의 관계보다도 ‘형제’ 관계가 더 강조돼왔다. 냉전이 종식되고 중국이 한국과 수교를 단행하면서 이 형제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시간대 중국은 본격적인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시작했다. 여전히 계획경제를 실시하는 북한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 나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형제 관계로부터 정상적인 국가 관계로 탈바꿈하는 진통이 시작됐다. 동시에 북핵 문제가 겹쳤다. 두 측면에서 오는 진통이 때로는 극한 통증을 유발하기도 한다. 양국이 겪고 있는 지금의 갈등은 결국 여기에서 파생되는 것이라 하겠다.

북핵 문제는 누가 뭐라 해도 한반도 냉전 구도를 유지하려는 미국과 그것을 탈피하려는 북한 사이의 갈등에서 유발된 것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북핵이 커질수록 미국의 역내 동맹체계가 강화되면서 중국에 거대한 압력으로 다가왔다. 북핵 게임은 북-중 관계의 진통기와 같은 시간대에 이루어지면서 애초부터 중국에는 불리할 수밖에 없는 쪽으로 전개되어 왔다. 어찌 보면 한·미·일과 북한의 줄다리기에서 오는 힘의 합력이 결과적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형국이 되고 있다. 한·미·일은 중국이 북한에 좀더 높은 강도의 압박을 가해주길 바란다. 중국에 대한 압력은 미국의 대중국 견제 전략과 겹친다. 북한은 북한대로 중국이 자신들의 핵 보유를 묵인해줄 것을 바란다. 그 바람은 어찌 보면 중국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과거 관계로 회귀해줄 것이란 기대와 겹친다.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
중국은 북한의 안보 우려 해소와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드팀없이 강조한다. 북핵 불가 의지도 어느 때보다 강하다. 북-중 관계 개선에도 이 원칙은 변화가 없을 것이다. 과거 관계로의 복귀도 없을 것이다. 북-중 관계는 이제 명실공히 뉴노멀 시대에 접어들었다. 양국은 이제 긍정적 에너지가 될 수 있는 지난 전통은 살려가고 시대에 맞지 않는 관성은 극복하면서 새로운 관계 정립을 이뤄가야 할 것이다.

진징이 베이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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