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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31 17:44 수정 : 2019.04.01 09:35

야마구치 지로
호세이대학 법학과 교수

올해 4월30일에는 아키히토 천황이 퇴위하고 5월1일에는 지금의 황태자가 새로운 천황으로 즉위한다. 이에 맞춰 새로운 연호가 사용되기 시작한다. 새로운 연호는 4월1일 공표되며, 일본에서는 새로운 연호가 무엇이 될까에 대해서 예상하는 것부터가 분위기를 달구고 있다.

연호는 역사의 흐름에서 본래 연속적인 시간을 군주의 치세에 따라 뭉텅 토막을 내는 것이다. 일본 관청들은 지금도 문서에 연호를 사용하고 있으며, 경제·사회 분야의 장기적 자료도 연호로 표기해오고 있다. 이전 연호인 ‘쇼와 ×년’이 지금으로부터 몇년 전인가 금방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에 매우 불편하다. 새로운 연호가 쓰이기 시작하면 그런 불편함이 배가될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일본인은 이런 불편함을 즐긴다. 현재 군주의 치세를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곳은 전세계에서 일본뿐이다. 이런 시대착오를 일본스러운 독특함이라고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물론 천황은 국가 정치에 관한 실질적 권력을 쥐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새로운 천황이 즉위한다고 해서 세상이 실질적으로 변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천황이 바뀌는 것에 따라서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얘기가 일본에는 넘쳐나고 있다. 이번에 천황이 바뀌는 것은 아키히토 천황이 건강한 상태에서 바통을 넘겨주는 것이다. 천황의 장례를 치러야 하는 상황도 아니므로 경박하게도 ‘신시대’의 도래라고 떠들썩한 것이리라.

이는 시대를 리셋해서 과거는 흘려보내고 싶다는 국민적 바람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음 천황의 시대가 된다고 해서 인구 감소 추세가 멈추지는 않고 원전 사고 상흔도 남는다. 물론 이러한 어려운 과제를 직시해서 다음 시대를 열어젖히려는 진지한 논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진지한 논의를 계속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작업이고, 지적으로 지속할 힘이 필요하다. 실제로 이러한 짜증 나는 논의에서 도망가고 싶다는 감각 자체가 보통 사람이 가진 감각이리라. 그래서 천황이 바뀌는 것은 이러한 도피를 하는 절호의 계기가 된다.

현 천황이 연호로 쓴 헤이세이 30년은 거품 경제는 붕괴하고 고베 대지진, 동일본 대지진, 인구 감소 사회로의 이행 등으로 일본 경제와 사회가 쇠약해지기 시작한 시대였다. 자연재해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인구 감소와 국내총생산(GDP)이 쪼그라드는 것은 예상이 가능한 문제였다. 예상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재난을 회피하기 위한 정책을 세우지 않은 점은 일본의 특징이다.

일본 헌법 제1조는 천황은 일본의 상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발 더 들어가면, 천황제는 일본의 어떠한 특질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이 시점에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에 쇼와 천황(히로히토)은 절대군주에서 상징으로 천황의 성격을 바꿔 살아남았다. 유감스럽게도 이 상징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망각한 무책임한 상징이었다. 이에 대한 반성도 있었기에 아키히토 천황은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평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직무를 수행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 개정을 지향하는 아베 신조 정권과 알력을 빚어왔다. 정치에 관해서 깊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키히토 천황이 한 말을 읽어보면 행간에서 현 정권의 개헌 추진을 경계하는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평화와 민주주의 수호를 천황의 권위를 빌려서 주장하는 것은 본말이 뒤집힌 것이다.

한심한 세상을 만든 점에 대해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음미하지 않으면 세상을 개혁할 수는 없다. 일본인 다수가 천황이 바뀌어 새로운 시대가 온다며 소란을 피우기만 하고 일본의 과제에서 눈을 계속 돌린다면 일본에 미래는 없다. 천황제가 과거의 망각과 역사의 리셋을 상징하지 않도록 논의를 계속해야 한다.

※<한겨레>는 일본의 군주를 원칙적으로 ‘일왕’으로 표기합니다. 그러나 이번 글은 일본인인 필자의 표기를 존중해 ‘천황’으로 그대로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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