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이대학 법학과 교수 제2차 세계대전 패배 뒤 74년이 지났다. 쇼와 천황(히로히토 일왕)이 포츠담 선언 수락을 선언한 8월15일은 불교 의식 중에서 죽은 이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우라봉’(盂蘭盆·우란분)의 날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전쟁으로 숨진 이들의 영혼을 위로해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 연중행사처럼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 과거 전쟁을 정당화하는 역사수정주의가 거칠게 불어서 이웃 나라와 관계가 험악해지고 있는 중이다. 조용히 숨진 이들을 추도하면 되는 시대 환경이 아니다. 일본과 아시아의 막대한 희생자가 불러온 교훈을 지금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읽어내야 할지 엄격한 물음을 받고 있다. 전쟁에서 숨진 이들에 대한 생각은 다양하다.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이 될 만한 책으로 요시다 미쓰루가 쓴 <전함 야마토의 최후>가 있다. 요시다는 학도병으로 해군 장교가 되어서, 전함 야마토에 승선해 오키나와 특공작전(자살공격 또는 죽음이 예상되는 무모한 군사작전)에 종군했으나 구사일생으로 귀환했다. 이 책은 그때 경험을 남긴 것이다. 일본의 패배가 결정적인 중에 무모한 특공작전에 나서기 전날 밤, 젊은 해군 장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서 죽는지 논쟁했다. 연장자였던 우스부치 이와오라는 대위가 “진보가 없는 이는 결코 이길 수 없다. 져서 눈을 뜨는 게 최상의 길이다. … 우리가 선도자가 된다”라고 한 말에 전원이 납득했다고 요시다는 적었다. 우스부치가 말했다는 “진보”와 “눈뜸”을 전후 일본인은 실현해왔던가. 확실히 패전 후 50여년간은 헌법 9조와 평화국가의 간판을 내걸고 경제발전에 매진해서 공격용 군사력을 갖지 않는 경제 대국이라는 모델을 만들어냈다. 전쟁 희생자 위에 일본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었다는 점은 전몰자 추도식에서 일왕과 총리가 반복하는 공식 견해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25년에 걸쳐 정체 상태를 지속하고 인구 감소가 시작되는 중에 근거가 없는 자민족 중심주의와 이웃 나라 멸시론이 확대됐다. 그 전쟁에서 일본이 아시아 사람들의 희생을 얼마만큼 초래했는지, 패배가 뻔한 미국과의 전쟁을 왜 시작했고 왜 좀 더 빨리 패전을 인정할 수는 없었는지. 이런 문제를 철저히 직시해서 원인을 규명하려는 지적 성실성이 일본 정치에는 결여돼왔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살아 있던 동안에는 전쟁을 혐오하는 감정을 서민도 공유했다. 또한 일본 군대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무엇을 했는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상식에 속했다. 경제 대국이라는 자부심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직접적 전쟁 경험이라는 지지대가 없어지자, 평화국가라는 정체성은 흔들리고 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라는 예술제의 기획 전시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에서 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소녀상이 전시된 것을 두고, 역사수정주의적 생각을 가진 나고야시 시장과 오사카부 지사, 심지어 일부 국회의원도 격렬히 비난했다. 예술제 사무국에도 협박이 쇄도해서, 결국 전시회가 중지되는 사태로 몰렸다. 징용공 문제와 수출 규제 등에서 일-한 관계가 험악해지고 있는 것에 편승해서, 일부 정치가가 정치적 소동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불을 붙인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시 시장은 소녀상에 대해 “일본인의 마음을 짓밟는다”고 말했다. 그는 군의 관여로 위안부가 모집되고 관리됐다는 일본 정부의 견해조차 무시했다. 가와무라같이 위안부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자가 일본인의 다수파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런 허구의 주장에 여당 정치가도 찬성하고 여기에 선동돼 폭력을 쓸 수 있다고 내비치고 협박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과거 범했던 죄를 직시하자는 논의에는 ‘반일’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힘을 이용해서 침묵하게 하는 풍조. 이것 자체가 우스부치가 목숨을 걸고 바꾸려고 했던 퇴행이자 미망이다. 사실에 대해 겸허하고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전쟁 희생자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칼럼 |
[세계의 창] 8월15일을 대하는 자세 / 야마구치 지로 |
호세이대학 법학과 교수 제2차 세계대전 패배 뒤 74년이 지났다. 쇼와 천황(히로히토 일왕)이 포츠담 선언 수락을 선언한 8월15일은 불교 의식 중에서 죽은 이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우라봉’(盂蘭盆·우란분)의 날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전쟁으로 숨진 이들의 영혼을 위로해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 연중행사처럼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 과거 전쟁을 정당화하는 역사수정주의가 거칠게 불어서 이웃 나라와 관계가 험악해지고 있는 중이다. 조용히 숨진 이들을 추도하면 되는 시대 환경이 아니다. 일본과 아시아의 막대한 희생자가 불러온 교훈을 지금을 사는 우리가 어떻게 읽어내야 할지 엄격한 물음을 받고 있다. 전쟁에서 숨진 이들에 대한 생각은 다양하다.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이 될 만한 책으로 요시다 미쓰루가 쓴 <전함 야마토의 최후>가 있다. 요시다는 학도병으로 해군 장교가 되어서, 전함 야마토에 승선해 오키나와 특공작전(자살공격 또는 죽음이 예상되는 무모한 군사작전)에 종군했으나 구사일생으로 귀환했다. 이 책은 그때 경험을 남긴 것이다. 일본의 패배가 결정적인 중에 무모한 특공작전에 나서기 전날 밤, 젊은 해군 장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서 죽는지 논쟁했다. 연장자였던 우스부치 이와오라는 대위가 “진보가 없는 이는 결코 이길 수 없다. 져서 눈을 뜨는 게 최상의 길이다. … 우리가 선도자가 된다”라고 한 말에 전원이 납득했다고 요시다는 적었다. 우스부치가 말했다는 “진보”와 “눈뜸”을 전후 일본인은 실현해왔던가. 확실히 패전 후 50여년간은 헌법 9조와 평화국가의 간판을 내걸고 경제발전에 매진해서 공격용 군사력을 갖지 않는 경제 대국이라는 모델을 만들어냈다. 전쟁 희생자 위에 일본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었다는 점은 전몰자 추도식에서 일왕과 총리가 반복하는 공식 견해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25년에 걸쳐 정체 상태를 지속하고 인구 감소가 시작되는 중에 근거가 없는 자민족 중심주의와 이웃 나라 멸시론이 확대됐다. 그 전쟁에서 일본이 아시아 사람들의 희생을 얼마만큼 초래했는지, 패배가 뻔한 미국과의 전쟁을 왜 시작했고 왜 좀 더 빨리 패전을 인정할 수는 없었는지. 이런 문제를 철저히 직시해서 원인을 규명하려는 지적 성실성이 일본 정치에는 결여돼왔다. 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살아 있던 동안에는 전쟁을 혐오하는 감정을 서민도 공유했다. 또한 일본 군대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무엇을 했는지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상식에 속했다. 경제 대국이라는 자부심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직접적 전쟁 경험이라는 지지대가 없어지자, 평화국가라는 정체성은 흔들리고 있다. 아이치 트리엔날레라는 예술제의 기획 전시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에서 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소녀상이 전시된 것을 두고, 역사수정주의적 생각을 가진 나고야시 시장과 오사카부 지사, 심지어 일부 국회의원도 격렬히 비난했다. 예술제 사무국에도 협박이 쇄도해서, 결국 전시회가 중지되는 사태로 몰렸다. 징용공 문제와 수출 규제 등에서 일-한 관계가 험악해지고 있는 것에 편승해서, 일부 정치가가 정치적 소동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불을 붙인 가와무라 다카시 나고야시 시장은 소녀상에 대해 “일본인의 마음을 짓밟는다”고 말했다. 그는 군의 관여로 위안부가 모집되고 관리됐다는 일본 정부의 견해조차 무시했다. 가와무라같이 위안부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자가 일본인의 다수파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런 허구의 주장에 여당 정치가도 찬성하고 여기에 선동돼 폭력을 쓸 수 있다고 내비치고 협박하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과거 범했던 죄를 직시하자는 논의에는 ‘반일’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힘을 이용해서 침묵하게 하는 풍조. 이것 자체가 우스부치가 목숨을 걸고 바꾸려고 했던 퇴행이자 미망이다. 사실에 대해 겸허하고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전쟁 희생자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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