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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08 17:58 수정 : 2019.09.09 14:06

슬라보이 지제크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미-중 무역전쟁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상황이 개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세계적 불황이나 지정학적인 대혼란이 발생하지는 않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미-중 무역전쟁은 그 이전에 시작된 무역전쟁의 연장선에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유럽연합(EU), 캐나다, 멕시코를 상대로 철강 및 알루미늄 수입제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며 무역전쟁의 포문을 열었다. 그가 내세운 명분은 불공정 무역 관행을 바로잡아 미국 노동계급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이제 공격 대상을 중국으로 집중하고 있다.

1970년대 초부터 미국은 야니스 바루파키스 전 그리스 재무장관이 말한 ‘글로벌 미노타우로스’의 역할을 맡아 세계 경제를 지배해 왔다. 그러나 2008년 이후 이 괴물이 지배하던 경제 주기가 붕괴하고 있다. 트럼프가 벌이는 무역전쟁은 이런 상황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은 무역적자 국가가 됐다. 미국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1971년 기발한 전략적 결정을 한다. 늘어나는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애쓰는 대신, 오히려 적자를 키우는 것이었다. 그 적자는 누가 책임지는가? 전세계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등지에서 엄청난 양의 물품을 수입한 다음, 이때 쓴 달러를 다시 미국으로 가지고 올 수 있는 국가다. 미국은 이렇게 가져온 달러로 자국의 적자를 메운다.

이런 식으로 미국은 생산하지 않는 포식자가 됐다. 십일조를 걷던 로마제국이나, 인신 조공을 받아먹던 미노타우로스처럼, 미국이 전세계로부터 매일 10억달러를 거둬들일 수 있는 것은 지난 수십년 동안 작동해온 경제체제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안정적인 ‘신뢰’할 수 있는 국가의 위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랍 산유국에서부터 서유럽과 일본, 심지어 이제는 중국까지도 미국에 잉여 수익을 투자한다.

미국이 이런 위치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이고 군사적인 이유 때문이다. 미국은 제국의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전쟁의 위협을 조성하고, 전세계 “정상 국가”들의 보편적인 수호자 역할을 자처해 왔다.

그런데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오면서 이런 경제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오바마 시절에는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 벤 버냉키가 미국 달러화가 세계 기축통화임을 이용해 돈을 마구 찍어내는 방식으로 이 체제의 수명을 연장했다. 트럼프는 이와 다른 방식을 취한다. 그는 무역 상대국들의 불공정 무역 관행 탓에 미국 내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고 주장하며, ‘불공정’의 문제를 무기로 삼는다.

하지만 트럼프가 불공정하다고 주장하는 그 경제체제는 사실 지난 수십년간 미국에 막대한 이윤을 안겨준 체제다. 미국은 그동안 무역 상대국으로부터 물품을 수입한 다음 그 대가로 미국의 국채를 지불함으로써 세계를 실질적으로 약탈해 왔다. 트럼프는 일련의 무역전쟁을 통해 일종의 부정행위를 하려 하고 있다. 그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철저히 미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전세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에 남겨진 유일한 선택지는 서로 연합해 미국이 쥐고 있는 패권을 약화하는 일이다. 지금 겪고 있는 곤경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주도하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창조해야 한다. 트럼프를 따라 자국 우선주의를 주장해서는 안 되며, 힘을 합쳐 그를 국제적으로 고립시켜야 한다.

미-중 무역전쟁이 물리적 전쟁이 아닌 경제전쟁에 불과하다고 안도해도 될까? 아니다. 지정학적인 재배치가 일어나는 상황은 전쟁으로 이어지기 쉽다. 지금의 국제정세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유럽의 정세와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 사라예보사건과 같은 일이 어디에선가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 새로운 사라예보가 어디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전쟁의 도화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터질지도 모른다.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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