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10.29 11:44 수정 : 2019.10.29 11:55

야마구치 지로

호세이대학 법학과 교수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서는 예외적인 단기간을 제외하고 보수 정당이 권력을 잡아왔다. 그런 상황에서 권력을 가진 보수 정당과 관료는 현실주의적이고, 이를 비판하는 야당과 진보적 미디어, 지식인은 이상주의적이라는 도식이 정착됐다. 그 함의를 더욱 파고들면, 야당이나 지식인은 아름다운 이상을 외치지만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이며, 보수 정당과 관료는 현실을 이해하고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다는 이미지가 붙어 있었다.

일본의 현실주의자가 말하는 ‘현실’은 권력자에게 편리한 사실의 일면일 뿐으로, 현실주의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은 ‘기성 사실’에 굴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은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가 70년 전에 지적했던 그대로다. 그런데도 일본 정책 결정자들은 자기중심적이며 일방적인 현실주의의 껍질을 벗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한은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악의 화신’이라는 점이 현실이며 이것이 일본인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직접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순식간에 일본의 현실도 변화했다. 이제는 아베 신조 총리가 북한과 전제조건 없이 대화를 진행하고 싶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보다 상위 권력자의 현실이야말로 현실이라는 알기 쉬운 사례다.

이달 중순, 내년 도쿄올림픽의 마라톤과 경보를 도쿄가 아니라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개최한다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발표한 것도, 상위 권력에 의해 현실이 완전히 뒤바뀌어 정책 결정자가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7월 말에서 8월 초의 도쿄는 폭염이 계속돼 야외 스포츠에는 맞지 않는다는 점이 명백한 현실이다. 그러나 경제 활성화 및 도시 개발을 위해 올림픽을 유치하고 싶었던 유치 담당자들은 그런 현실을 무시하고 ‘맑은 날이 많고 온난해서 운동선수들이 최고의 상태로 퍼포먼스를 발휘할 수 있는 이상적 기후’라고 후보지 지원서에서 강조했다. 이 문장은 지금 유행하는 말을 사용하자면 ‘포스트 진실’이며, 결국 세계를 속여서 올림픽을 도쿄에 유치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도쿄올림픽 개최가 결정되고 나서, 일본식 현실주의는 점점 더 맹위를 떨치게 됐다. 재정 부담이 너무 커졌기 때문에 개최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또한 이번에 국제올림픽위원회가 발표한 것처럼 폭염 때문에 선수와 관중 가운데 열사병과 같은 온열 질환이 많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처음부터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현실주의는 일단 결정된 일에 트집을 잡지 말라며 다른 의견은 봉쇄했다. ‘기성 사실’에 굴복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주의의 진짜 모습이다. 갖가지 악조건을 극복하거나 무시하고, 무턱대고 올림픽을 개최하는 것 자체가 현실주의다. 무더위 대책도 화제가 됐지만, 도로에 물을 뿌린다든지 작은 양산 모양의 모자를 머리에 쓰는 식과 같은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대책이 홍보됐다. 그러고 나서 국제올림픽위원회가 마라톤과 경보 경기를 도쿄가 아니라 삿포로에서 개최하겠다고 한 발표는 일본을 뒤흔들었다. 일본 정부는 ‘가상 공간’(버추얼 리얼리티)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국제올림픽원회는 선수의 건강을 지키고 경기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진짜 현실’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중요한 일은 일본에 맡길 수 없다는 불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최근 여러 가지 사건을 접하며 일본은 더 이상 선진국이 아닌 것으로 되지 않았느냐는 의문도 든다. 올림픽을 둘러싼 소동은 일본의 위기가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상징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원자력발전을 둘러싼 정책, 대학입시 개혁 등 어느 것을 보더라도 사실을 직시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합리적으로 검토한다는, 정책 결정 과정의 불가결한 지적 작용이 정지된 것으로 여겨진다. 정책 결정자에게 편리한 ‘현실’에 대해, 진정한 현실을 들이대는 ‘대항적 지성’이 필요하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계의 창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