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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5 18:18 수정 : 2019.12.16 02:35

로버트 페이지 ㅣ 영국 버밍엄대 사회정책학과 교수

지난 10월 <한겨레>가 주최한 제10회 아시아 미래포럼에 토론자로 초청받는 영예를 누렸다. 아시아 국가 방문은 처음이었는데, 인상적이고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한국과 세계 각국의 저명한 정치인과 학자, 공무원을 만날 수 있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현재의 한국을 만든 정치·사회·문화적 저력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책과 영화를 찾아보고 있다. 많은 한국인도 현재의 영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미디어를 찾아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영국 영화 거장인 켄 로치 감독의 작품들은 좋은 출발점이다.

로치 감독은 1966년 <비비시>(BBC) 방송 드라마 <캐시가 집에 오다>를 연출하면서 처음으로 영국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이 드라마는 경제적 불안과 불운, 경직된 관료주의 절차가 어떻게 사람들을 빈곤과 홈리스의 삶으로 던져 넣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영국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약 1200만명이 본방송을 시청했다. 드라마가 어찌나 실감이 나는지, 캐시 역을 맡은 배우 캐럴 화이트가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나서 길을 멈춰야 할 정도였다.

로치 감독의 2019년 최신작 <미안해요, 리키>는 ‘0시간 계약’으로 택배 운송을 하는 자영업자와 그 가족의 삶을 고찰하며 현시대의 도덕성을 얘기한다. 그의 최고작으로 꼽힐 것 같다. 영화는 영국 북동부 뉴캐슬을 배경으로, 건설노동자의 몰락을 그린다. 건설노동자는 2008년 금융위기 때 실업자가 되면서 안정적 수입과 내 집 마련의 꿈을 잃은 채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의 아내 애비는 재가 요양 돌보미로 저임금 장시간 일을 한다. 따뜻한 마음씨의 그녀는 무리하게 이윤만 추구하는 요양업체의 빡빡한 일정 탓에, 공감과 존엄의 돌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는 현실에 점차 좌절한다. 그녀는 이런 현실을 바로잡으려, 개인 시간까지 쪼개 가장 취약한 계층의 고객들을 자발적으로 찾아다니며 식구처럼 돌본다.

이 영화는 힘겹고 과중한 경제적 압박이 어떻게 가족과 인간관계를 파탄 낼 수 있는지를 주목하게 만든다. 영화평론가 피터 브래드쇼는 <가디언> 기고에서, 이 영화를 ‘0시간 계약’에 속박된 서비스경제 노예제의 나라인 영국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온 ‘격정적인 보고서’라고 묘사했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영화에 악당들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심지어, 돈 좀 있는 자들에겐 관대하고 하층 노동자들은 안중에도 없는데다 과대망상증 환자 같은 물류창고 매니저마저도 고장 나고 잔인한 경제 시스템의 희생자로 그려진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딜레마는 불공정한 경제 시스템의 희생자 다수가 자신들의 고충을 풀어줄 좌파 정치인이 아닌 우파 포퓰리즘 정치인들에게 투표한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보수적이거나 전체주의적 가치를 지지하며 정규교육 기간이 짧은 노동계급의 보수당 지지자들은 자유주의나 좌파 지식인들에게 회의적이다. 이들은 유약한 지도자보다 강력한 지도자를 선호하며, 노동조합 조직률도 갈수록 낮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열정적인 브렉시트 지지자들이다. 그들이 켄 로치 감독의 영화를 볼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영국에서 우파 포퓰리즘의 득세는 정치적으로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겐 틀림없이 걱정거리다. 이 어려운 시대를 밝혀줄 횃불을 찾는 이들이라면 통념을 깨는 정치에세이 작가이자 저명한 서유럽 사학자인 토니 주트의 저작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가 도움이 될 것이다.

빈곤층에 대한 낙인찍기와 불평등의 확대 속에서 주트는 사회민주주의가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그는 우파들의 부정적인 담론에 맞서 복지국가를 수호하며 평등과 연대의 원칙을 위해 싸울 필요성을 강조한다. 주트는 아직 젊은 나이인 62살에 신경계 질환으로 2010년 세상을 떠났다. 전세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공포의 정치’가 아니라 ‘희망의 정치’에 대한 헌신적 의무를 재확인하는 것이 주트를 기리는 최적의 헌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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