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이 지제크 ㅣ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참패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원인은 세 가지다. 첫째,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브렉시트에 대한 보수당과 노동당의 선명한 입장 차이다. 보수당은 “브렉시트를 완수하자!”는 구호를 내걸고 선거에 임했다. 노동당의 선거 전략은 최악이었다. 노동당은 유럽연합(EU) 잔류를 지지하는 유권자와 탈퇴를 지지하는 유권자 중 어느 쪽도 놓치지 않으려고 브렉시트 문제에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의자 두 개에 한꺼번에 엉덩이를 걸치려다가는 그 사이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을 수밖에 없다.
브렉시트에 대한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의 입장도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코빈은 개인적으로는 브렉시트를 찬성하는 쪽이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이루려는 급진적인 좌파적 변혁은 유럽연합의 규제 안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브렉시트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데에는 다양한 합당한 이유가 존재할 수 있음으로 코빈의 견해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진짜 문제는 노동당이 공개적 입장을 표명하는 대신 새 브렉시트 합의안과 유럽연합 잔류를 모두 선택지로 제시하면서, “국민에게 결정할 기회를 주겠다”며 자신들의 부담을 전가한 것이다. 재앙에 가까운 전략이 아닐 수 없다. 국민은 정치적 지도자가 자신들에게 어려운 결정의 의무를 지우기 원하지 않는다. 국민은 지도자가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제시해주기를 원한다. 보수당은 그렇게 했고, 노동당은 그러지 못했다.
둘째, 코빈에게 조직적으로 덧씌워진 반유대주의자 이미지다. 총선 직전 미국에 본부를 둔 유대인 단체 ‘사이먼 비젠탈 센터’는 코빈을 ‘2019년 최악의 반유대주의자’로 선정했다. 나는 이것이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만큼이나 심각한 선거 개입이라고 생각한다. 유대인 단체들은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모든 이를 반유대주의자라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 총선 기간 중 한 이스라엘 단체는 내가, 이스라엘 비판과 반유대주의는 다르다는 칼럼을 썼다는 이유로 나를 “유럽 반유대주의의 철학적 배후”라고 비난했다. 또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유대인 기자 기드온 레비를 “하마스의 대변인”이라고 공격했다. 레비가 공격받은 대목을 보자.
“지금 유럽과 미국에서는, 시오니즘이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 점거를 비판하기만 해도 이를 반유대주의로 규정하는 법들이 압도적인 지지 속에 통과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유대인 단체들은 당장은 이 상황이 즐거울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유대인 단체들이 이런 움직임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 그들은 엄청난 반유대주의적 후폭풍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애국자”는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지하는 유대인이 아니라 레비 같은 유대인일 것이다. 레비는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이들을 모조리 반유대주의로 몰아가는 경향이 계속된다면 이야말로 심각한 반유대주의를 초래할 것임을 날카롭게 내다본다. 마르크스가 우리에게 알려준 것처럼, 반유대주의는 반자본주의가 전치되어 발생한다. 사회적 적대의 원인으로 자본주의를 탓하는 대신, 유대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거꾸로 이스라엘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급진주의자 좌파들을 무조건 반유대주의자로 몰아붙인다. 이런 일은 지금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혐오를 조장하는 데 이것보다 더 위험한 방법이 있을까.
우려스러운 것은 친자본주의적 세력이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와 결합했다는 점이다. 미국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은 태생적으로는 반유대주의적이었지만, 이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하면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 내용을 근거로 이스라엘을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 2008년 7월 오스트리아 일간지 <디 프레세>에 이런 만평이 실렸다. 나치를 연상시키는 다부진 체격의 두 오스트리아 남자. 한명이 신문 기사를 가리키며 동료에게 말한다. “이것 좀 보게. 지극히 정당한 반유대주의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향해 웃기지도 않는 트집을 잡는 작자들이 또 나타났군.”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비판적 유대인들을 반유대주의자라고 공격하면서 스스로 반유대주의적이 되듯, 미국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은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좌파를 맹렬히 공격한다.
셋째, 내가 ‘피케티의 함정’이라고 부르는 문제다. 토마 피케티는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복지국가 모델을 급진화할 것을 제안한다. 피케티가 제안하는 모델은 사유재산을 국유화하는 공산주의 소련 시절의 방식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부를 재분배하는 방식이다. 피케티는 25살이 되는 청년들에게 일정한 기본자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누진적 소득세를 강화한다면 청년들에게 선진국 1인당 평균 자산의 60%를 기본자금으로 지급할 수 있고, 탈탄소화에 드는 비용도 충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제안에서, 노동자는 이사회의 50%를 배당받아야 하며, 가장 큰 주주의 투표권도 10% 이하로 제한된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차원에서는 탄소카드를 만들어 각 개인이 소비하는 탄소량을 측정하고 그에 따라 탄소세를 부과하게 된다.
피케티 본인도 자신이 제안한 모델이 성공하려면 위와 같은 조치들을 국가 단위가 아니라 범세계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막강한 힘을 지닌 국가가 이를 강력하게 추진해야만 하는데, 오늘날과 같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체제 안에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국가가 존재할 수 없다. 만약 그런 국가가 존재한다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기본적인 문제들은 이미 해결되었어야 할 것이다. 피케티의 해법은 자본주의와 민주적 절차의 틀 안에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실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매우 유토피아적이다.
자, 이번에 노동당이 이겼다고 상상해보자.(또는 버니 샌더스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상상해 보자) 그럼 이제, 전세계 거대 자본 세력이 온갖 더러운 술수를 동원해 얼마나 강력한 반격을 퍼부을지도 생각해보라. 어쩌면 영국 유권자들이 노동당이 승리했을 때 닥칠 수 있는 위험을 의식하고 안전한 게임을 택한 것은 아닐까?
지구온난화에서 난민 문제까지, 디지털 통제에서 유전자 조작에 이르기까지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모두 이 사회를 전지구적으로 재구조화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레닌주의적 공산주의로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의회 민주주의로도 그렇게 할 수 없다. 특정한 정당이 승리한 다
음 사민주의적 조처를 취하는 것으로는 세상을 전면적으로 재편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볼 것이 있다. 그것은 민주사회주의자들이 지닌 치명적인 한계다. 펠릭스 가타리와 안토니오 네그리가
공동집필한 <자유의 새로운 공간>(1985)은 영어권에서는 <우리 같은 공산주의자>라는 바뀐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제목의 변화가 암시하는 바가 바로 지금의 민주사회주의자들의 태도 아닐까. “저희도 여러분과 다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저희는 여러분을 해치지 않아요. 겁먹지 말고 저희를 지지해 주세요. 저희가 이긴다고 세상이 완전히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요.” 불행하지만 이런 식은 우리의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세상이 완전히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요’가 아니라,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 우리의 입장이 어떻든, 우리는 급진적인 변화를 이뤄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영국 노동당이나 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과 같은 정당이나 세력을 온전히 지지해야 한다. 급진적인 변화를 이룰 이상적인 순간만을 기다린다면, 그런 순간을 영원히 맞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 있는 곳에서 일단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선거제도나 사민주의적 조처로 급진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미망을 품지는 말자. 우리가 바라는 미래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생존이 걸린 험난한 항해를 시작했다.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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