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9.20 19:19
수정 : 2019.09.20 19:25
[토요판] 김선영의 드담드담
미국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
2008년, 미국 워싱턴 린우드에서 강간 사건이 일어난다. 집에서 잠을 자다 피해를 입은 마리 애들러(케이틀린 디버)는 직접 경찰에 신고한다. 하지만 경찰은 마리의 오락가락하는 진술에 의혹을 품고, 위탁가정을 전전한 과거와 연관지어 마리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가운데, 마리는 점점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린다. 3년 뒤, 콜로라도주 골든 경찰서의 캐런 듀발(메릿 위버) 형사는 좀처럼 단서가 보이지 않는 강간 사건을 수사하던 중 같은 범인을 쫓고 있던 베테랑 형사 그레이스 라스무센(토니 콜렛)을 만난다.
지난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원제 ‘Unbelievable’)는 제목 그대로, 믿기 힘든 실화를 담고 있다. 강간 피해자가 경찰 조사 과정에서 2차 가해를 당하고 오히려 무고죄로 기소된 이 기막힌 사건은, 끈질기게 연쇄강간범을 추적한 두 여성 형사와 수사팀에 의해 그 진실이 비로소 밝혀진다. 미국의 비영리 탐사전문 인터넷 매체 <프로퍼블리카>와 비영리 온라인 저널리즘 단체 마셜프로젝트의 두 기자는 이 사건을 오랜 시간 동안 취재하면서 여성 대상 폭력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점과 제도의 허점을 날카롭게 짚어냈고, 이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2016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넷플릭스 시리즈는 바로 이 보고서를 재구성한 논픽션 도서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원제 ‘A False Report: A True Story of Rape in America’>를 원작으로 한 이야기다.
연쇄강력범죄를 소재로 한 대부분의 드라마는 범인과 이를 추적하는 자의 대결 구도로 흘러간다. 이 과정에서 추적자를 따돌리고 범죄 행각을 이어가는 범인은 무시무시한 존재로 신비화되고, 피해자들은 범인이 얼마나 잔혹한 괴물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처럼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기존의 가해자 위주 서사와 전혀 다른 길을 택한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철두철미하게 수사망을 피해온 강간범인데도, 드라마는 그의 ‘성취’에 전혀 관심이 없다. ‘면도날 잭’이니 ‘44구경 살인마’니 하는, 연쇄강력범에게 흔히 붙는 ‘수식어’도 없고, 피해자가 몇명이라는 ‘기록적 수치’를 강조하지도 않는다. 드라마는 범인을 그저 꼭 잡아야 하는 수많은 흉악범 중 하나로 건조하게 그리면서 강력범죄를 다루는 대중미디어의 문제점을 환기한다.
범인 이야기가 배제된 대신 전면에 나서는 것은 강간 피해 생존자들과 형사들의 이야기다. 드라마는 노골적인 범죄 묘사 없이도 피해 여성들의 트라우마와 다양한 반응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그들이 고통 속에서도 강인함을 잃지 않는 모습을 함께 그린다. 형사들의 수사 과정에서도 단순히 범인을 잡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유명무실한 범죄 피해 보상제도, 너무도 부실한 성폭력 데이터베이스 등 “아무도 여성 대상 폭력의 자료를 들여다보지 않는” 성차별적 현실과 강간 문화의 문제점을 녹여낸다. 여성 대상 범죄를 소재로 한 드라마, 범죄 스릴러 장르의 새로운 지평을 연 걸작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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