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7.07 18:41
수정 : 2014.07.08 10:34
소문난 식당 주인 할머니는 며느리에게도 요리비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지만, 현대 한국의 성인 대다수 역시 자식에게조차 숨기는 비장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 보물은 아무리 부자라도 하나씩밖에는 가질 수 없다. 바로 인감도장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몇몇 나라들에서 이 물건은 법인격(法人格)의 명백한 의지를 표현하는 도구이다.
한국인들은 먼 옛날부터 도장을 사용했으니, 단군신화에 나오는 천부인(天符印)을 도장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100여년 전까지만 해도 문서에 찍히는 도장은 주로 관인(官印)이나 직인(職印)으로서, 관(官)의 권위와 공신력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이었다. 개인 간의 계약이나 거래에는 도장을 쓰지 않았으며, 개인의 도장은 서화 작품에 낙관(落款)할 때에나 필요한 정도였다. 개인의 의지를 표현할 때에는 붓으로 쓰거나 그리는 부호를 사용했다. 붓을 쥘 자격이 있는 사람은 수결(手決)이라는 고유의 식별부호를 사용했고, 그럴 자격이 없는 천민(賤民)은 수촌(手寸)이라는 손가락 그림으로 제 뜻을 표시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어음이나 전당표 등에 위조 방지 목적으로 도장을 사용하는 관행이 정착했고, 개항 이후 청, 일 양국인과 거래가 늘어나고 값싼 인주와 도장 재료가 수입되면서 개인 간 거래에도 도장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대한제국 시기의 신문들에는 “사용하던 도장을 잃어버려 새로 만들었으니, 예전 도장이 찍힌 어음이나 문서에 속지 말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광고가 수시로 실렸다.
한국을 강점한 일제도 도장 사용을 권장했다. 위조하기 쉬운 수결이나 수촌으로는 아무래도 문서의 공신력을 담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914년 7월7일, 조선총독부는 인감증명규칙을 제정하여 ‘도장을 자주 사용하는 자, 기타 일반 인민은 주소지 관할 관청에 인감증명신청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어제(7월7일)가 현대 한국인들의 신줏단지, 인감도장이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이 ‘이상수의 고전중독’ 후속으로 매주 화요일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1년 이상 고전을 소재로 통찰력 있는 글을 써준 이상수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전우용 필자는 한국 근대사 전문가로 근대 이후 일상 속으로 다가온 물건들을 통해 당대 삶의 속살을 들여다볼 계획입니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