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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25 19:07 수정 : 2014.08.25 19:08

“우리는 실내에 들어갈 때 모자는 벗지만 신발은 벗지 않는다. 그런데 조선인들은 반대로 신발은 벗으나 모자는 쓴 채로 들어간다.” 개화기 이 땅에 온 서양인들은 모자와 신발에 관한 조선의 풍습이 서양과 정반대인 점을 신기하게 여겼다. 조선시대 성년과 미성년을 구분하는 기본 표지는 신체의 최상단, 머리 모양에 있었다. 성인 남성은 신분 고하에 관계없이 상투를 틀었고, 성인 여성은 쪽 찌고 비녀를 꽂았다. 아무리 신분이 높고 부유해도, 어른이 아니면 이런 머리 모양을 할 수 없었다. 조선 사람들이 1895년의 단발령에 의병을 일으키면서까지 격렬히 저항했던 데에는, 사람들 사이의 위계를 정하는 표지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만도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장발 남성이 차츰 사라지면서 성년과 미성년을 나누는 식별부호를 신체에 부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줄어들었으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성년의 표지는 신체의 다른 부위들로 분산 이동했는데 특히 신체의 최하단부인 발을 감싸는 신발이 모자의 기능을 상당 부분 인계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서양식 가죽 신발인 구두는 조선시대 양반의 모자이던 갓과 비슷한 사회적 기능을 담당했다.

구두라는 단어의 유래는 불확실하나, 일본 개항장에 문을 연 서양 잡화점의 구즈(goods)에서 나왔다는 설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단발령 직후 군부용달회사가 일본인 기술자를 초빙하고 직공 16~17명을 모아 구두를 만들어 군대에 납품했는데, 이것이 국산 구두의 효시다. 1900년께에는 이때 뽑힌 최초의 구두 직공 중 한 사람인 김성근이 원구단 옆, 지금의 소공동에 개인 양화점을 차렸던바 민간 구두 산업은 여기에서 시작했다.

이후 지금까지 한 세기 넘게, 구두는 신사와 숙녀의 표지이자 그들의 욕망이 집중적으로 투사되는 물품이라는 지위를 굳게 지키고 있다. 구두보다 훨씬 편한 신발이 많아졌음에도, 현대인들은 발의 고통과 신체 일부의 변형을 감수하면서까지 구두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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