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대한제국관이 개설된 그 이듬해, 새로 알게 된 나라에서 새 인생을 개척하고 싶었음인지, 프랑스인 앙통 플레상이 서울에 들어왔다. 그는 당시 서울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는 물건이 무엇인지 살피고는 바로 땔감 사업에 뛰어들었다. 우선 한국식 이름을 ‘부(富)가 찾아올 만큼 상서롭다’는 뜻의 ‘부래상’(富來祥)으로 짓고는 육조거리, 지금의 세종로 한구석에 커피를 담은 화살통만한 보온병을 들고 서 있다가 무악재를 넘어오는 땔감장수들에게 다가가서 “고양 부씨입니다”라 인사하고 커피 한잔씩을 따라준 뒤 흥정을 붙였다. 땔감장수들은 얼떨결에 약인 줄 알고 마셨다가, 나중엔 인이 박여서 제 발로 플레상을 찾았다고 한다. 황족과 일부 귀족들만 마실 수 있었던 가배차는 이렇게 서민 세계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이 뒤로도 반세기 넘게, 커피는 대중적 기호품 대열에 끼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호텔, 끽다점, 다방, 바, 카페 등에서 커피를 팔았으나, 커피를 마시는 것은 대체로 상류층이나 지식인들에게 흔한 문화적 허영으로 취급되었고, 마시는 사람들도 그런 시선을 되레 즐기는 편이었다.
커피가 ‘사회인’들의 일상에 깊이 파고든 것은 한국전쟁 이후였다. 숱한 건물이 파괴되고 생활이 피폐해져 당장 손님맞이가 어려워진 사람들에게 대화의 장소를 제공한 것이 다방이었고, 미국에서 들어온 커피는 그 다방들이 값싸게 제공할 수 있는 최적의 음료였다. 사람들이 차츰 커피에 인이 박여가면서 “커피 한잔합시다”는 “이야기 좀 합시다”를 대체하는 말이 되었다. 그 와중에 담배꽁초 우린 물로 커피 맛을 내는 기술이 개발되기도 했고, 커피에 계란노른자를 띄운 모닝커피가 발명되기도 했다.
지금은 도시 공간 곳곳에 커피 전문점이 있고, 건물 안 곳곳에 커피자판기가 있으며, 집집마다 커피 내리는 기구나 ‘커피믹스’ 통이 있다. 오늘날의 커피는, 사람 사이의 대화와 교감을 매개하는 대표 물질이다.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