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2.08 18:51
수정 : 2014.12.08 18:51
“우리나라에선 4~5층짜리 상업용 건물은 예쁘게 지어봐야 아무 소용 없어요. 도시가 추해지는 건 건축가 탓이 아니에요.” 예전 어떤 건축가가 한 말이다. 간판들이 건물 외벽을 완전히 가려버리기 때문이란다. 몇해 전부터 지자체들이 간판 정비에 착수하여 글자체와 크기를 규제한 덕에 시야를 압도하는 간판들은 많이 줄었으나, 대신 가로 경관의 획일화가 새 문제로 부각되었다.
건물에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우리의 전통문화에 속한다. 규모 있는 전통 건축물의 처마 밑에는 어김없이 숭례문, 근정전, 대웅전, 영화당 등의 이름표가 붙는다. 현판 또는 현액이라 부르는 이 이름표들은 건물의 필수 구성 요소로서, 현판을 다는 것은 그림으로 치면 화룡점정에 해당한다. 그러니 건물 외벽에 붙이는 상업용 임시 이름표들을 간판이라는 이름으로 구분한 것은 무척 적절한 처사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서울 종로는 상점들이 즐비한 상가였으나, 이 거리에 간판을 단 건물은 없었다. 건물 앞에 늘어놓은 물건과 안에 쌓아놓은 물건이 무엇을 파는 상점인지 알리는 표시였다. 개항 이후 외국 상인들이 서울과 개항장에 상점을 내면서 간판을 단 건물들이 나타나자, 잠시 주저하던 한국 상인들도 이윽고 그들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는 간판 제작 업체도 생겼다. 그런데 한국 상인들은 처음부터 ‘과장된 크기’를 선호해서 1920년 무렵부터는 ‘대머리 상투 같은’ 간판들이 도심지 가로 경관을 지배하게 되었다. 낡은 한옥 지붕 위에 올려 세운 간판들이 흡사 몇 올 안 되는 머리카락을 꼬아 정수리에 올려 세운 대머리 상투처럼 위태로워 보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간판들은 구멍가게를 상회나 슈퍼마켓으로 태연히 둔갑시켰다.
현대의 표준적인 한국 성인들이 책 안의 글자와 간판의 글자 중 어느 것을 더 많이 보는지는 알기 어렵다. 실체를 드러내는 척 은폐하는 과장된 크기의 간판들이 현대 한국인의 표준적 심성과 닮았다는 지적에 반박하기도 어렵다. 대학에 입학하는 걸 ‘간판 따러 간다’고 한 지도 이미 꽤 오래되었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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