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12.15 18:54 수정 : 2014.12.15 18:54

“조선이 점차 개발됨에 따라 근래 ‘세멘토’의 수용이 더욱 증가하여 1년간 이입량이 약 2천만통에 달하고… 조선인들은 이를 대개 분묘에 이용하는데 일반 조선인이 장래에 이 세멘토를 사용하게 되면 그 수용은 막대히 증대하리라더라.”(<매일신보> 1915년 8월25일)

시멘트는 ‘부순 돌’이라는 뜻의 라틴어 ‘카이멘툼’(caementum)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 건축용 접착제 일반을 뜻했다. 인류가 건축물에 접착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부터이며,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도 석고와 모래를 섞은 접착제가 사용되었다. 가장 오랫동안 널리 사용된 것은 석회인데, 주된 건축 재료가 흙과 나무였던 우리나라에서도 석회는 필수적이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시멘트라 부르는 것은 1824년 영국에서 ‘발명’된 포틀랜드 시멘트로서, 석회석에 점토 등을 섞어 구운 이 물질을 물과 섞어 굳히면 포틀랜드산 석재와 비슷한 색깔이 났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우리나라에 포틀랜드 시멘트가 언제 처음 도입되었는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서고 철도 부설 공사가 진행되던 19세기 말에는 흔히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00년에 개시된 덕수궁 석조전 공사에는 1867년 프랑스에서 처음 개발된 철근 콘크리트도 사용되었다.

한반도에서 시멘트 생산이 시작된 것은 1919년 함경남도 문천군에 건설된 오노다 시멘트 공장이 가동하면서부터다. 이 공장은 당시 조선 내 공장 중 최대 규모였다. 시멘트 산업은 1960~70년대 압축 성장에도 견인차 구실을 했다. 새마을운동에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는’ 사업이 추가된 것은, 생산 과잉으로 고심하던 모 시멘트 회사 사장이자 ‘권력 실세’였던 사람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라는 학설도 있다.

현대인들, 특히 대도시 주민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시멘트가 주성분인 콘크리트 벽체 안에서 보낸다. 건물 밖 대로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도 역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다. 그래서일까? 옛날에는 나이가 들수록 현명해지고 지혜로워진다고들 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의식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지기만 하는 것 같다.

전우용 역사학자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