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1.26 18:43
수정 : 2015.01.26 18:43
‘할 수 있다’와 ‘해도 된다’는 어떻게 다른 걸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쓸데없는 걸 갖고 시시콜콜 따지는 피곤한 인간’ 취급받기 십상이다. 현대 한국인에게 둘은 약간의 뉘앙스 차이만 있을 뿐 사실상 같은 말로 취급된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현상이야말로 현대 한국 사회의 핵심 문제에 직결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자로 표기한다면 앞의 말은 능(能)에 해당하고 뒤의 말은 가(可)에 해당한다. 앞의 말이 행위의 기준을 주체의 내면에서 찾는 것이라면, 뒤의 말은 외부에서 찾는 것이라 해도 좋다. 즉 앞의 말은 주체의 능력과 자질에 관련된 것이고, 뒤의 말은 권력의 허용 여부에 관련된 것이다. ‘수영할 수 있다’는 자신이 헤엄치는 기술을 익혔다는 뜻에 가깝고, ‘수영해도 된다’는 권력이 수영 금지 구역으로 지정하지 않았다는 뜻에 가깝다.
국가권력은 발생 당초부터 자기 힘이 미치는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제어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당장 고조선의 ‘팔조법금’도 현대어로 풀면 ‘법으로 금지하는 것 8가지’라는 뜻이다. 그러나 일단 허용한 영역에서는 사람들의 능력을 평가하여 인증하는 제도를 만들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지금도 농사짓거나 돌 나르는 일에는 특별한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자격증명서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06년 정부의 구매 공고에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정부가 상인들에게 요구한 것은 물건 공급 자격증명서로서 문자 그대로 자산 등급 증명서에 가까웠다. 자격증을 자질과 인격을 인증하는 증서라는 뜻으로 쓰게 된 것은 직업의 종류가 급증하고 국가권력이 국민을 자원으로 취급하는 태도가 굳어진 뒤였다. 해방 뒤 교원 자격증을 필두로 여러 자격증이 생겼으며, 특히 1990년대 이후 그 종류는 폭증했다. 한국에서 이제 자격증은 직업을 얻기 위해 필수적인 물건으로 취급된다. 하지만 이런저런 자격증을 얻는 데 심력을 다 기울이는 탓인지, 현대 한국인들은 정작 ‘인간의 자격’에 대해서는 무심한 듯하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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