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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기차

등록 2015-03-02 19:20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汽笛) 소리에/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우리네와 외국인 같이 탔으나/ 내외 친소(親疎) 다 같이 익혀 지내니/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최남선, 경부철도가, 1908)

유럽에서는 18세기 말부터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수송수단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804년 리처드 트레비식이 철로 위를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처음 만들었고, 1825년에는 조지 스티븐슨이 만든 기관차가 영국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에서 상업 운행을 개시했다. 이후 철도는 전 세계로 확산되어 ‘근대 문명의 총아’가 되었다.

이 땅에 처음 놓인 철도는 1899년 9월18일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철도였으며, 1905년에는 경부철도가, 이듬해에는 경의철도가 각각 개통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의 철도는 그것을 부설하는 자본과 그것이 놓이는 땅 사이의 권력관계를 표상하는 물건이었으나, 이 관계는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최남선이 찬탄한 대로, 이 물건에서 낡은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고 세계를 하나로 묶는 근대 문명의 힘을 인식한 사람이 더 많았다.

기차는 물질세계를 바꿨을 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세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차는 사람들에게 앉은 채로 바깥세상이 움직이는 광경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런 경험은 곧 다른 대중교통수단으로 확산되면서 일상화했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세상은 변한다는 감각과 차비만 있으면 고생하지 않고 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식이 현대인의 세계관과 역사관 일부를 구성한다.

이런 태도는 대의제 민주주의와 정합적이다. 투표권 행사는 행선지가 적힌 기차표를 끊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는 민주주의가 주권자에게 요구하는 기본 덕목과는 배치된다. 기차는 현대 민주주의의 딜레마, 즉 바라는 건 많으나 스스로는 무책임한 주권자들을 만들어내는 데 단단히 한몫한 물건이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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