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3.09 19:24 수정 : 2015.03.09 19:24


1926년 10월16일 일본 원정에 나선 조선축구단은 8전 5승 3무의 성적을 거두고 그달 말 귀경했다. 당시 한글 신문은 일본 최강팀 리조(鯉城) 구락부 팀을 상대로 한 경기에 대해 “일본인 선수들은 도저히 추종하지 못하는 조선군 득의의 롱슛과 교묘한 패스로 2점을 넣어 결국 2 대 0으로 조선군이 쾌승하였다”고 보도했다. 축구공 하나만을 무기로 삼은 군대로나마 식민지 종주국 군대를 연파했다는 사실에 감격한 경성부민들은 경성역에 달려나가 ‘조선군’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조선인은 축구와 마라톤에 특장점이 있다’는 말은 일제강점기 상식을 넘어 진실처럼 통용되었다. 더불어 조선인이라면 모름지기 축구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사람들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경성제국대학의 경우 검도, 유도, 수영, 승마, 농구, 야구 등의 운동부에는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축구부는 조선인 학생만으로 구성되다시피 했다. 다른 종목이야 어떻든 축구만은 일본에 져서는 안 된다는 ‘민족적 의지’는 이 무렵에 형성되었다.

이 땅에 상륙한 최초의 근대 축구공은 1882년 영국 군함 플라잉호스호의 승무원들이 가져온 것이었다. 1900년경에는 일본 유학생 출신 관리들이 축구구락부를 조직했으며, 1904년에는 관립 외국어학교 학생들이 체계적인 축구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 얼마 뒤 축구공을 수입해 파는 잡화상점이 생겼고, 1910년대에는 운동구 전문 상점들도 생겼다.

축구는 공 하나만 있으면 경기장의 넓이나 참가 선수의 숫자에 관계없이 할 수 있는 경기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유독 축구에 강했던 것도 이 종목이 가난을 용인했기 때문이다. 평등해서 대중적인 축구는 인간 의식의 심층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현대인은 경쟁과 협력이라는 상반된 가치가 공존하는 모순적 상황에서 개인의 위치와 역할을 수시로 재설정해야 하는 어려운 함수 문제에 늘 직면하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남자들에게, 축구공은 이런 문제를 푸는 반복 학습의 핵심 교재였다.

전우용 역사학자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