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적을 들어 서탁 위의 벼루에 물을 조금 따르고 먹으로 간다. 종이를 펴 놓고서는 한 귀퉁이를 문진으로 누른 뒤 붓을 들어 먹물에 적시고 글씨를 써 내려간다. 한 글씨를 쓸 때에도 손목을 여러 번 놀려야 했고, 몇 글씨 쓰고는 다시 붓을 벼루 위로 옮겨야 했다. 종이가 귀했던데다가 먹으로 쓴 글씨는 지워지지도 않았으니 애초에 잘못 쓰지 않도록 한 글씨 한 글씨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써야 했다. 옛날에 글 쓰는 일이란, 이토록 번거롭고 심력이 많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글을 쓸 줄 안다는 것은 특권을 뒷받침하는 능력이었으며, 대다수 사람들은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대신 이 번거로운 역을 면제받았다.
연필, 만년필, 볼펜 등의 새로운 필기구가 등장한 뒤 글씨 쓰는 일은 한결 쉬워졌고, 같은 무렵 글 쓸 자격에 대한 사회적 제한도 사라졌다. 보편적 국민교육 체제하에서 일정 연령에 도달한 아이들은 가장 먼저 연필 쥐는 법을 배워야 했고, 학교에 다니면서 수많은 글씨를 써야 했다. 이리하여 글씨 쓰는 능력을 갖춘 신체가 보편화한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붓과 연필이나 볼펜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글씨 쓰기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타자기였다. 이 물건은 글씨 쓰는 속도를 향상시켰을 뿐 아니라 글씨에서 개성을 지웠다. 1876년 최초의 알파벳 타자기가 실용화했고, 1913년에는 이원익이 한글 타자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타자수는 전문직에 속했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타자기는 키보드로 자태를 바꿨고, 무선 통신기기와 결합한 뒤에는 형태적 제약에서도 벗어났다. 지금은 액정에 쓰여 전파 속에 흩뿌려지는 글씨가 종이에 펜으로 쓰인 글씨보다 더 많은 시대다. 현대의 젊은이들이 1년 안에 쓰는 글씨 수는 옛날의 대학자가 평생에 걸쳐 쓴 글씨보다 많다. 그러나 글씨 쓰는 능력이 글 쓰는 능력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글씨 쓰기와 글쓰기는 다른 일이다. 글씨 읽는 것과 글 읽는 것도.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