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은 조선 여성들이다. 그들은 밥 짓고 빨래하고 아이 보고 바느질하느라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다. 그들은 식구들 중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들고 가장 먼저 일어난다. 반면 조선 남성들은 거리에서 장기를 두거나 한담을 나누면서 종일 빈둥거린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사람들이다.’ 19세기 말 서울에 있으면서 한국인의 가정사에 관심을 기울였던 서양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기록했다. 반면 일본인들은 조선의 서민 가정 여성들이 일본 여성들보다는 집안의 대소사에 대해 상대적으로 발언권이 세다고 보았다. 그 무렵 조선 여성의 가정 내 지위는 서양 여성보다는 턱없이 낮고 일본 여성보다는 아주 약간 높은 정도였다.
유교는 여성들에게 삼종지도를 가르쳤다.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결혼한 뒤에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아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여성의 본분이었다. 그들에게 배정된 공간은 집안뿐이었지만, 그 공간조차 지배할 권리가 없었다. 여성을 가사 관리권을 가진 주체로 재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서 ‘현모양처론’이 도입되면서부터였다.
1907년 4월, 일본의 예에 따라 제정된 고등여학교령 시행규칙은 가계부기를 필수 교과로 채택했다. 같은 무렵 가계부기 교과서와 참고서들도 발간되었다. 하지만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주부는 극소수였다. 평범한 주부들은 가계부를 쓸 줄도 몰랐고 쓸 이유도 없었다.
월급쟁이들이 많아지고 글자와 숫자를 아는 주부도 늘어난 1920년대 이후 ‘규모 있는 살림’과 절약을 위해 가계부를 쓰는 주부들이 본격 출현했다. 총독부와 계몽 지식인들이 이들을 지원했다. 가계부는 주부들이 가정 경제의 관리권을 장악한 새 시대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주부들은 해방 이후 내무부 장관이나 재무부 장관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여성잡지들은 예외 없이 연말 별책 부록으로 가계부를 제공했다.
가계부는 지난 한세기 동안 주부라는 직업인의 권리를 뒷받침하는 물건이었으나, 이제 그 역사적 사명도 다해 가는 듯하다.
전우용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