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7.27 18:38
수정 : 2015.07.27 18:38
순찰을 돌던 순사가 길에 누워 자는 사람을 발로 차 깨우며 집에 들어가라고 호통을 친다. 잠결에 걷어차인 사람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목 뒤에 흥건히 흐른 땀을 닦고선 집 안으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밖으로 나와 다시 흙바닥에 몸을 누인다. 1920~30년대 한여름 밤이면 서울 주택가 골목길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장면이다. 1960년대까지도 한여름 밤 무더위를 피해 철길 옆에 나와서는 냉기가 도는 철로를 베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그대로 영영 눈을 뜨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곤 했다.
한여름 무더위를 삼복더위라고 한다. 초복·중복·말복의 복(伏)은 사람 옆에 개가 엎드려 있는 것을 형상화한 글자다. 여기에서 사람이 개고기 먹는 모습을 연상하는 독자도 있겠으나, 실은 더위에는 굴복하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뜻이다. 굴복하기 싫을 때 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도망가는 것인데, 그래서 ‘더위를 피해 도망친다’는 뜻의 ‘피서’(避暑)라는 말이 생겼다. 물론 부채가 있기는 했으나 이것으로 더위에 맞서는 건 말 그대로 당랑거철(螳螂拒轍)이었다.
…부채 바람을 연속으로 불어내는 자동 기계, 즉 선풍기가 나온 뒤에야 더위는 겨우 억누를 만한 것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선풍기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05년, 관부연락선에 이 기계가 설치되었을 때로 추정된다. 이후 이 기계는 병원 특실과 특급 호텔, 고관의 사무실, 부호들의 안방으로 퍼져나갔지만, 1960년대까지도 서민들에겐 사치품이었다. 큰맘 먹고 선풍기를 들여놓은 집에서는 이 기계 정면 자리를 차지하려고 형제자매들끼리 다투는 일이 아주 흔했다.
집, 자동차, 학교, 직장, 상점 등 대부분의 실내 공간에 에어컨이 설치되는 데에는 그로부터 한 세대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현대인들은 에어컨을 이용해 더위를 굴복시키고 자기 몸 주위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사람 주위에서 쫓겨난 더위가 도망간들 어디로 가겠는가? 현대인은 지구를 열 받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존재다.
전우용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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