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8.10 18:33
수정 : 2015.08.10 18:33
옛날 장애인은 앉은뱅이, 절름발이, 귀머거리, 벙어리 등으로 불렸다. 여기서 ‘이’는 ‘이이’ ‘저이’ 할 때의 그 ‘이’로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에 호칭의 차등은 없었다. 그런데 유독 시각장애인만은 장님, 봉사, 소경이라 했다. 장님이란 지팡이 짚은 어르신이란 뜻이고, 봉사는 조선시대 8품 벼슬, 소경은 고려시대 4품 벼슬이었다. 호칭으로는 시각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몇 등급 높았던 셈이다.
옛사람들이 시각장애인을 높여 부른 데에는, 육신의 눈이 감기면 마음의 눈이 열린다고 믿은 신비주의적 태도와 더불어 시각장애가 주로 노년에 발생했던 사정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눈, 코, 귀, 혀 등 감각기관 앞에 ‘노’자를 붙이는 것은 눈뿐이다. 노안은 있지만 노이, 노비, 노치, 노설은 없다. ‘침침한 눈’은 노인다움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였고, 요즘 기준에선 가벼운 안질로도 실명하는 사람이 많았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보조기구로 안경을 발명한 것은 13세기 이탈리아 수도사들이었다. 16세기 말에는 이 물건과 그 제조법이 명나라를 거쳐 우리나라에까지 들어왔다. 당시 렌즈는 수정을 갈아 만들었는데, 경주 남산의 수정으로 만든 것을 최상품으로 쳤다. 19세기 말 고급 안경의 값은 미화 15달러, 엽전 5만냥 정도여서 부유한 노인이나 가질 수 있는 귀물(貴物)이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유리렌즈가 보급되면서 안경 값은 크게 떨어졌고, 이때부터 근시인 젊은이들도 안경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후로도 오랫동안, 안경을 쓴 채로 어른 앞에 서는 것은 불경(不敬)이었다.
지난 한 세대 사이, 한국인의 감각기관 중 그 기능이 가장 현저히 약해진 것이 눈이다. 원경을 볼 수 없는 도시 건축 환경, 하루의 대부분을 손끝과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보내야 하는 일상 등으로 인해 이제 한국 도시 성인의 반 이상이 안경과 콘택트렌즈에 의존하는 시각장애인이다.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근시안적 태도’가 일반화한 것도 혹시 이 때문은 아닐까?
전우용 역사학자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