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또 임신한 사실을 안 그녀는 도저히 낳아 키울 자신이 없었다. 지금의 6남매도 제대로 못 먹이고 못 입히는데 더 낳아봤자 천덕꾸러기만 될 것 같았다. 모진 마음을 먹은 그녀는 부엌에서 간장 서너 사발을 들이켜고 뒷산으로 올라가 가파른 언덕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나 뱃속의 아이는 떨어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 읽은 위인전 중 한 토막이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강인한 생명력과 불굴의 의지를 보였고 천지신명의 보살핌까지 받은 그가 결국 온 백성을 빈곤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낸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위인전에 따르면, 그 시절에 효과적인 피임약이 없었기에 한국인들은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를 가진 셈이다. 인생의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신령들이 다 불공평했지만, 자식을 점지하는 삼신할미는 특히 심했다. 하나만 점지해 달라고 지극정성으로 비는 집은 거들떠보지 않으면서 그만 낳을 테니 오지 말라는 집에는 계속 들락거리곤 했다. 20세기 초까지, 가임기를 넘긴 여성은 평균 6~7명의 아이를 낳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인구가 급증하지 않은 것은 높은 영유아 사망률과 기근, 역병, 전쟁 때문이었다. 생활환경 개선, 의학 발전 등으로 사망률이 낮아지자 높은 출산율이 빈곤을 심화하는 주범 중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남성용 피임기구는 3천여년 전에도 있었지만, 정작 아이를 낳는 여성에게는 임신과 출산 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아이 만드는 약’이 있었던 것처럼 피임약도 있었으나 둘 다 효능이 의심스러웠다. 1930년대에도 ‘피임약은 효과가 적고 기형아 출산 등의 부작용이 있다’는 말이 정설처럼 유포되었다. 먹는 피임약 에노비드가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얻은 것은 1960년이었다. 이 약 덕에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고, 각 가정이 미래의 가족 규모를 계획하는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젊은이보다 노인이 더 많은 시대를 만드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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