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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24 17:54 수정 : 2016.08.24 19:21

전우용
역사학자

‘족보도 없는 놈’. 한동안 ‘상놈’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욕설이다. 요즘도 국립중앙도서관 족보실이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는 가문의 역사를 온전히 이어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일념으로 ‘잃어버린’ 족보를 찾는 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들 다수는 “족보가 있었는데 6·25 때 잃어버렸다”는 선친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1476년에 간행된 안동 권씨 족보다. 양반 사대부 가문에서 족보 편찬이 일반화한 것은 이로부터 100년이 훨씬 지난 뒤였으니, 족보의 역사는 일반이 생각하는 것만큼 길지 않다. 게다가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양반 사대부보다 그럴 수 없는 상놈(상한, 常漢)과 천민이 훨씬 많았다. ‘족보도 없는 놈’이 대다수이던 시대에는 이 말이 욕이 될 수 없었다.

남의 집안 족보에 자기 이름을 올려 신분을 세탁하는 모록(冒錄)은 조선 후기에도 있었으나, 신분제가 공식 소멸한 뒤에 오히려 흔해졌다. 성(姓)이 없던 천민들은 새 성씨를 만들기보다는 주인집 성을 따르는 쪽을 택했다. 물론 족보에 자기 이름을 올리기 위해서는 거액이 필요했다. 염상섭의 소설 <삼대>에서 조의관이 족보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쓴 돈은 3천~4천원에 달했다. 그 무렵 쌀 한 가마니 가격은 10원 정도였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한 뒤, 종이도 부족한 상황에서 족보 발간이 급증했다. 한편에는 사라질 성씨에 관해 마지막 기록이라도 남겨두자는 충정이 있었을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는 막판 떨이로 한몫 챙기려는 심사도 있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족보도 없는 놈’ 처지에서 벗어났다. 신분제가 공식 소멸한 지 50년 만에 인구의 대다수가 신분 세탁에 성공한 것은 세계사상 유례를 찾기 어렵다. 현국 현대의 역동적인 발전을 이끈 것도 신분의 굴레에서 해방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신분제 사회로 되돌아가자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사회의 퇴행은, 의식의 퇴행과 병행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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