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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31 18:08 수정 : 2016.08.31 20:29

전우용
역사학자

앉은뱅이, 절름발이, 곰배팔이, 벙어리, 귀머거리, 곱사등이, 장님, 애꾸, 언청이, 육손이…. 요즘에는 ‘언어의 박물관’에 들어가야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도덕적 제약 없이 통용되던 단어들이다. 운명론과 윤회사상의 영향력이 컸던 시대 사람들은 장애를 ‘전생에서 지은 죗값’이나 ‘하늘이 내린 벌’로 이해했고, 그래서 ‘병신’이라는 단어에 주저 없이 경멸의 뜻을 담았다. 몸이 불편한 것도 서러운데 멸시까지 받아야 했으니, 장애인의 삶은 자체로 ‘천형’(天刑)이었다. 중증 장애인의 경우 요행히 여유 있는 집에서 태어났으면 평생을 집 안에 갇혀 살았고, 그렇지 않으면 구걸로 연명하다 생을 마치는 게 보통이었다.

소아마비나 뇌성마비는 흔한 질병이어서 하반신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은 무척 많았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도 이동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은 쉬 뿌리내리지 못했다. 최초의 휠체어는 16세기 중엽 에스파냐 귀족 제한 러마이트가 펠리페 2세를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장애인용이 아니라 환자용이었다. 하반신 장애인을 위한 휠체어가 대량생산된 것은 미국 남북전쟁 이후였다. 의학이 발달한 덕에 하체만 절단하고 생명을 건진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휠체어가 보급된 것은 그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1960년대였다. 6·25전쟁 중 총탄이나 포탄에 의한 하반신 복합골절을 치료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 절단이었다. 미군 군의관들은 한국군 군의관들을 ‘절단의 천재’라고 불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휠체어가 보급될 무렵, 전국 각 도시들에 지하도와 보도육교 건설 붐이 일었다. 나라에 다리를 바치고도 천대받으며, 비싼 휠체어를 장만하고도 쓸 데가 없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도로교통에서 장애인의 통행권을 배려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이후였다. 보도육교가 사라지고 횡단보도가 늘어나는 데 비례해서, 휠체어를 타고 거리로 나오는 장애인도 늘어났다. 하지만 장애인에게 편한 것이 비장애인에게도 편하다는 생각은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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