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1950년 11월 말, 압록강 남쪽 장진호에서 중국군에 포위된 미군 병사들은 적군보다 먼저 날씨와 싸워야 했다. 혹한에 대비한 의복과 장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맞은 영하 30도의 강추위는 말 그대로 살인적이었다. 수통의 물이 얼어 눈을 퍼먹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위생병들은 앰풀을 입안에 넣어 얼지 않도록 했다. 그들이 입안에 보관한 의약품 앰풀은 페니실린이었다. 1928년 영국의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페니실륨속의 푸른곰팡이가 대사과정에서 분비하는 화학물질이 박테리아를 죽이거나 그 증식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 물질에 페니실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로부터 11년 뒤인 1939년, 영국 옥스퍼드의 연구원 하워드 플로리와 언스트 체인이 페니실린을 대량으로 추출하고 정제하는 방법을 개발함으로써 비로소 항생제의 시대가 열렸다. 뒤이어 스트렙토마이신, 오레오마이신, 클로람페니콜 등의 항생제가 속속 개발되어 2차 세계대전 중 유럽 전장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 항생제가 처음 들어온 것은 해방 이후 미군과 함께였지만, 그 당시에는 환자뿐 아니라 의사들조차도 이 약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한국인들이 페니실린을 비롯한 항생제의 놀라운 효능을 실감한 것은 6·25전쟁 중이었다. 페니실린은 부상으로 인한 감염병은 물론 성병에도 탁월한 효능을 보였다. 의약품을 관리하는 의무사병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페니실린을 내놓으라는 전투병과 장교들의 반복되는 요구였다. 후방 지역의 암시장에서는 군대에서 흘러나온 페니실린이 금값으로 팔렸다. 항생제는 의사에게는 치료에 대한 자신감을, 환자에게는 의학에 대한 신뢰를 높여주었다. 더불어 ‘열나고 헛소리하는’ 질병을 귀신의 소행 탓으로 이해하던 무지(無知)도 분쇄했다. 항생제로 인해 세균과 미생물에 대한 두려움은 반감되었고, 무당의 위세도 쪼그라들었다. 그런데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슈퍼박테리아가 새로 출현한 건 필연적인 자연현상이지만, 지성(知性)에 내성을 가진 슈퍼 샤머니즘이 출현한 건 참 어이없는 사회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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