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포유류는 흔히 초식동물과 육식동물로 나뉘며, 둘을 겸하는 잡식동물은 그리 많지 않다. 인류는 잡식동물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다. 초본류의 씨앗(=곡식)을 주식으로 삼는 포유류는 인간밖에 없다. 인간은 ‘곡식 먹는 동물’이 되기로 작정함으로써 비로소 문명을 창조, 저장, 전승할 수 있었다. 여러 곡식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많이 심는 것은 밀, 쌀, 옥수수의 3종이다. 경지 면적에서는 밀이 32%, 쌀이 20%, 옥수수가 18%, 생산고로는 밀이 29%, 쌀이 26%, 옥수수가 25%이다. 그런데 인구 부양 능력은 쌀이 가장 커서, 전세계 인구의 35% 정도가 쌀만을 주식으로 삼는다. 혹자는 유사 이래 한민족이 저지른 최대 실수가 ‘쌀 문화권’에 편입된 것이라고 한다. 한반도는 벼농사의 북방 한계선에 위치하여, 기후 및 기상이 그에 적합하지 않다. 파종기에는 으레 가물고 추수기에는 수시로 태풍이 몰려온다. 그래서 쌀은 언제나 결핍된 주곡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쌀 부족을 보완한 것은 보리였다. 드물게 밀도 심었으나, 양이 아주 적었고 제분도 어려워 밀가루 음식은 거의 만들지 못했다. 밀가루 국수는 현대에 창조된 전통음식이다. 한국인들이 본격적인 밀가루 음식을 접하게 된 것은 개항 이후 서양인들과 함께 빵, 크래커, 쿠키 등이 들어온 뒤였다. 이 맛에 반해 ‘크리스마스 신자’가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미국이 원조물자로 보내준 밀가루 포대가 지천에 널림에 따라, 밀가루 음식의 지위는 급전직하했다. 1970년대 중반 정부는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해 혼식과 밀가루 음식을 적극 권장했고, 당대의 과학은 “쌀만 먹으면 해롭다”는 담론을 유포시켰다. 더불어 밀가루 음식의 지위도 다시 상승했다. 그러나 이 뒤 불과 20여년 만에 쌀이 남아돌기 시작하자, 과학은 다시 쌀의 ‘무해성’을 주장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쌀은 ‘관념상의 주곡’일 뿐이며, 밀가루와 쌀의 지위는 대략 동등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권력이 원하는 대로 학설을 창조했던 과학이 기여한 바도 적지 않다.
칼럼 |
[전우용의 현대를 만든 물건들] 밀가루 |
역사학자 포유류는 흔히 초식동물과 육식동물로 나뉘며, 둘을 겸하는 잡식동물은 그리 많지 않다. 인류는 잡식동물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다. 초본류의 씨앗(=곡식)을 주식으로 삼는 포유류는 인간밖에 없다. 인간은 ‘곡식 먹는 동물’이 되기로 작정함으로써 비로소 문명을 창조, 저장, 전승할 수 있었다. 여러 곡식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많이 심는 것은 밀, 쌀, 옥수수의 3종이다. 경지 면적에서는 밀이 32%, 쌀이 20%, 옥수수가 18%, 생산고로는 밀이 29%, 쌀이 26%, 옥수수가 25%이다. 그런데 인구 부양 능력은 쌀이 가장 커서, 전세계 인구의 35% 정도가 쌀만을 주식으로 삼는다. 혹자는 유사 이래 한민족이 저지른 최대 실수가 ‘쌀 문화권’에 편입된 것이라고 한다. 한반도는 벼농사의 북방 한계선에 위치하여, 기후 및 기상이 그에 적합하지 않다. 파종기에는 으레 가물고 추수기에는 수시로 태풍이 몰려온다. 그래서 쌀은 언제나 결핍된 주곡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쌀 부족을 보완한 것은 보리였다. 드물게 밀도 심었으나, 양이 아주 적었고 제분도 어려워 밀가루 음식은 거의 만들지 못했다. 밀가루 국수는 현대에 창조된 전통음식이다. 한국인들이 본격적인 밀가루 음식을 접하게 된 것은 개항 이후 서양인들과 함께 빵, 크래커, 쿠키 등이 들어온 뒤였다. 이 맛에 반해 ‘크리스마스 신자’가 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미국이 원조물자로 보내준 밀가루 포대가 지천에 널림에 따라, 밀가루 음식의 지위는 급전직하했다. 1970년대 중반 정부는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해 혼식과 밀가루 음식을 적극 권장했고, 당대의 과학은 “쌀만 먹으면 해롭다”는 담론을 유포시켰다. 더불어 밀가루 음식의 지위도 다시 상승했다. 그러나 이 뒤 불과 20여년 만에 쌀이 남아돌기 시작하자, 과학은 다시 쌀의 ‘무해성’을 주장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쌀은 ‘관념상의 주곡’일 뿐이며, 밀가루와 쌀의 지위는 대략 동등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권력이 원하는 대로 학설을 창조했던 과학이 기여한 바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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